뿌연 안갯속에서 수묵화처럼 희미하게 눈이 쌓인 와룡리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바스락바스락 얼어붙은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 주르륵 두레박을 내리는 소리, 쏴아 물 붓는 소리, 푸우 입김을 내뿜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고요 속에 단 하나 우주의 귀처럼 우물이 열려 있습니다. 이른 새벽, 아주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마당의 우물은 심호흡을 한 다음 마음을 엽니다. 땅 깊은 곳에서 흐르던 따뜻한 기운이 두레박을 타고 올라옵니다. 포근포근 지구의 가슴이 데워집니다. 비로소 동쪽 하늘에서 발그스레한 해가 솟아올라 온 세상을 두루 비춰줍니다.
“엄니, 읍내로 가는 길이 뚫렸다고 하던데요......”
설이 엄마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다 놓고 방안을 들여다봅니다. 미동할머니는 설이의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있습니다.
"옆집에 박씨가 읍내 볼일이 있응께, 댕겨 올란갑 드라. 가믄 뭔 소식이 있것제.”
설이 엄마는 보리쌀을 씻어 솥에 앉힙니다.
미동할머니는 설이를 포대기에 싸서 안고 부엌을 내다봅니다.
“보면 볼수록 이쁜 것이 사내자식 안 부럽구만, 그래도 아들이 아니라고 어쩔랑가 모르겄다.”
미동 할머니는 설이를 제 어미에게 안겨주고는 부엌으로 나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핍니다.
설이에게 젖을 물리고 앉은 설이 엄마의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져 옵니다.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찬 우물물 한 사발이면 가슴이 뻥 뚫리곤 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사내 녀석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설이 엄마는 쪽쪽 빨아대는 아이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며 눈으로 얘기합니다. 뽀얀 살결에 쌍꺼풀이 또렷하게 진 설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납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서 그런지 아침상을 물리고 나니 해가 중천에 떠있습니다.
기저귀와 아기 속옷이랑 베갯잇, 옷 몇 가지를 챙겨서 우물로 나오니 이웃집 박씨 부인도 나와서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거무스름한 피부에 손마디도 굵고 뼈 골격이 굵직굵직한 박씨 부인은 애를 낳고도 한 달을 못 참고 나와 찬물에 손을 담급니다.
"벌써 밖에 나왔어요?”
박씨 부인과는 달리 설이 엄마는 목소리가 여리고 피부도 하얗습니다.
"읍내에서 곱상하니 자란 사람허구, 이런 촌구석에서 잔뼈가 굵은 나하고는 다른 것잉께. 나는 항상 이래도 어디 뼈마디 쑤신 디가 없응께. 걱정 말드라고 잉?”
박씨 부인은 빨랫감을 찬물에 빙빙 돌려가며 헹궈 냅니다.
"아이고, 이것이 누구랑가. 설이 아배 아닝교?”
읍내에서 얼마나 일찍 걸음을 나선 것인지, 설이 아빠가 마당 사립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억세고 부지런한 박씨 부인은 막 빨래를 마치고 들어가려던 참이고, 행동이 설은 설이 엄마는 이제 막 빨래를 시작하려던 참입니다.
"듣자 하니께, 시원찮은 가시내를 낳아부렀다고 잉? 읍내에서 두어 달을 보냄서도, 내가 꿈적도 않고 장모님한테 붙어서 조용히 지냈는디, 글씨, 아무짝에도 쓸디없는 가시내를 낳아부렀다고 잉? 나는 아들 낳기 전에는 집에 안 들어갈 것잉게, 그리 알더라고 잉?”
설이 아빠는 벌서 읍내로 가던 박씨를 만나 소식을 듣고는 주막에서 한 잔 걸치고 홧김에 달려온 것입니다. 얼마나 취했는지 제 몸도 잘 못 가누며 비틀거리면서도 설이 엄마의 빨래통을 발로 냅다 걷어차 버립니다. 비누와 방망이, 옷가지가 눈밭에 나가떨어집니다.
"아이고, 엄니, 아이고, 엄니. 아범이...”
설이 엄마는 설이 아빠를 눈밭에 밀쳐버리고는 집안으로 달려들어갑니다.
"아이고, 이 놈아, 술은 왜 처먹고 난리야. 한 번 생겨난 것을 어쩌라고 그려? 얼매나 이쁘게 생겼는디 보도 안 허고 나간단 것이여, 잉? 아이고, 이놈아.”
엉겁결에 달려 나온 미동 할머니는 눈밭에서 일어나 밖으로 내빼는 설이 아빠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박씨네는 벌써 아들이 다섯이나 되는디, 나는 왜 한 놈도 없단 말이여. 다 소용 읎당께 잉?”
설이 아빠는 미동할머니도 매몰차게 떼어버리고 사립문밖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미동할머니는 우물물을 한 두레박 퍼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끼얹습니다.
"지아비복이 없으믄 자식복도 없단 말이 헛말이 아닌겨.”
미동 할머니는 얼굴 씻은 물을 버리고 다시 두레박을 내려 우물물을 길어 올리며 우물 속에다 한 마디 내 뱉습니다. 미동할머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듯이 뿌옇게 김을 올리며 두레박을 타고 우물물이 올라옵니다. 벌컥벌컥 우물물을 몇 모금 들어마십니다. 할딱거리던 숨이 가라앉고 마음이 안정이 됩니다.
안방에서는 설이의 울음소리가 퍼져 나옵니다. 세상에 던져졌지만 환영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를 알기라도 한 것처럼 설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기만 합니다.
마당의 우물은 왠지 마음이 슬퍼서 높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우물의 크기만큼 하늘이 내려와 우물의 슬픈 가슴에 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