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자 얼어붙은 눈 산이 녹기 시작합니다. 봄볕은 따뜻한 기운을 마당의 눈 더미 위에 불어넣습니다. 며칠째 버석거리는 마당의 눈을 퍼서 우물 아래 미나리꽝에 쌓는 일을 했습니다. 설이 네도 박씨 네도 눈을 치울 때만큼은 한 가족이 됩니다. 삽을 들고 망태기를 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부산하게 움직입니다.
"아따 징그랍게도 눈이 많이 내려 부럿다 잉? 닷새째 눈을 치우니께 인자사 땅이 보이는고만 그려."
우람하게 딱 벌어진 어깨와 알통을 자랑하는 박씨는 첫째 아들 일채에게 삽과 망태기를 들려주며 헛간을 가리킵니다.
"느이들이 아녔으면 이놈의 눈을 언제 다 치웠것냐? 일채, 이채, 삼채, 사채, 박씨네 떡두꺼비 같은 아들들 덕분이고만 잉? 느이들 이리 들어와서 고구마 먹고 가그라. 그라고, 우리 손지딸 설이도 한 번 보고 잉?"
미동할머니는 박씨네 첫째 아들부터 넷째 아들까지 손목을 잡아끌며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어쩐지 아까부터 고구마 냄시가 난다 그랬다 잉?"
박씨네 셋째 아들 삼채가 주먹으로 씨익 콧잔등을 훔치며 입맛을 다십니다.
"짜아식~, 그놈의 코는 개코다 잉? 우째 그렇게 먹을 꺼만 밝히냐!"
둘째 아들 이채가 삼채의 코를 한 번 잡아서 비틀어 줍니다.
"그래, 어쩔래? 먹을 것 밝히면 안 되냐 잉?"
구수한 고구마 냄새 때문에 뱃속이 꼬르륵꼬르륵 야단을 치는데도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며 박씨네 아들들이 설이네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햐, 고것 참 이쁘게 생겼다 잉?"
제일 먼저 들어간 일채가 잠들어 있는 설이의 볼을 살짝 꼬집어 봅니다. 이채는 설이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삼채는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사채는 오물거리는 입술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야 그라지 말고 느이 어매랑 할아부지도 오시라 그래라. 일 마치고 먹을라고 고구마를 많이 삶았으니께 후딱 가서 모시고 오그라. 그라고 느이 막내동상 오채도 데리고 온나 잉."
미동할머니가 다그치자 사채가 못 이기는 척 자기 집으로 달려갑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고구마 한 소쿠리와 살얼음이 진 동치미 한 대접, 맛있게 익은 김장 김치 한 접시를 설이 엄마가 안방 문을 열고 들이밉니다.
"잡숴 보씨요. 땀 배고 일헌 뒤라 맛이 그만일 것잉게 잉?"
미동할머니의 권유에 박씨가 먼저 고구마 한 개를 집었다가 놉니다.
"거 막걸리 읇어요? 지는 고구마 보담도 시원하게 목이나 축였으믄 좋갓구만요. 없으믄 냉수라도 한 사발 주시고라 예?"
"그라믄 막걸리를 받아 와야 헐 것인디, 누가 주막에 갔다 올 것이여?"
맛있는 고구마를 앞에 두고 아무도 나서지를 않자 박씨는 손사래를 칩니다.
"아니 됐어라오. 받어다 둔 게 있으믄 몰라도 인자사 언제 주막까지 가것어요?"
박씨네 아들들은 군침을 삼키며 아버지가 고구마 잡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고, 아이들 숨 떨어지것네. 어서 한 개 집어 들고, 야들 먹으라고 햐!"
그제서야 박씨는 마지못해 고구마 한 개를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박씨네 아들들은 고구마를 큼직한 것으로 한 개씩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어 댑니다.
"산밭에다 심어서 그런지 우리 꺼보다 더 맛있다 그제?"
입안 가득 고구마를 넣고 동치미까지 한 숟갈 떠 넣으며 사채가 삼채를 보고 씨익 웃습니다.
그때 마침 박씨 부인이 오채를 안고 들어오다가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삼채에게 한 마디 내뱉습니다.
"야, 이놈아, 볼딱지가 퉁겨져 나오것다. 천천히 먹어라 잉?"
"놔 두랑게 잉. 먹을 꺼 앞에 두고 애들이 다 그러제 뭐. 안 그런가 박씨!"
"그람요. 지도 어렸을 때 그랬어라오."
박씨 말을 듣고 미동할머니가 한바탕 웃어 댑니다.
"그 아부지에 그 아들이고만 잉?"
"아니여라, 지를 젤 많이 닮은 놈은 인자 태어난 오채랑게요. 어린것이 몸 생김새도 우락부락한 디다 이목구비가 굵직굵직한 게 지를 꼭 빼 닮았당게라오. 이담에 크면 힘깨나 쓸 것이구만요."
박씨는 다섯째 아들 오채가 퍽이나 자랑스럽다는 듯이 박씨 부인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습니다.
정다운 새참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추녀 끝에는 고드름이 녹아서 마당에다 똑똑 구멍을 내며 떨어집니다. 질척 질척 마당의 흙이 보이고 담장 옆으로는 고랑진 홈을 만들며 눈이 녹아 흐릅니다. 녹은 눈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 흘러서 흙을 뚫고 모래를 뚫고 바위를 지나 깊이깊이 내려갑니다. 우물의 근원인 지하수까지 내려갑니다.
언제 빨래를 해서 널은 것인지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래 줄에는 이불과 베갯잇, 옷가지들이 하얗게 햇볕을 받고 있습니다. 설이 엄마는 마당에 서서 자신이 마치 빨래 감이라도 된 양 몸과 마음을 햇볕에 말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