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순오 Oct 30. 2024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활노래

삼하 1장

나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사람이 죽으면 기분이 어떠할까?

"휴! 살았다."

"이제야 안심이다."

"비로소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겠구나!"

대체로 이런 반응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여기다가 왕위가 걸린 문제라면 어떠할까? 차기 왕이 되려고 내정된 사람이 현 왕위에 있는 사람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할 처지였는데, 쫒던 왕이 적군에 의해 게 된다면?

"이  다 후련하다!"

"잘 죽었네."

아마도 이런 반응이지 않을까 싶다.


다윗처럼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그러게. 진작  순순히 물러나시지. 그러면 내가 선왕의 예우를 제대로 해주었을 데, 안타깝도다!"


그러나 다윗은 전혀 다른 반응을 한다. '활노래'를 지어 부르며 슬퍼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이미 폐하신 사울왕은 순순히 왕권을 넘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새로 세우신 다윗왕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이 아니던가? 이것은 세상 법칙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우리나라 정치만 보아도 다윗의 방법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대선 중에는 경쟁자들이 서로 상대방 죽이기 작전으로 험담공세가 이어지고, 정권을 잡은 뒤에도 혹시나 다음 위정자가 될지도 몰라서 죽이기 작전을 펴기도 한다. 전직 위정자들의 죄를 있는 대로 다 찾아내고 또 보복수사를 해서 감옥에 넣기도 한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왕과 그의 세 아들(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어 길보아산에 매달리자 그들의 용감함을 기리며 '활노래'를 지어 부르며 금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온 백성이 함께 다윗왕을 따라 사울과 세 아들과 이스라엘 군인들의 죽음을 슬퍼한다.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 죽으면 그가 한 좋은 일을 찾아서 기억해 줄 수 있을까? 글쎄, 사람이 죽으면 좋은 모습만 남기고 나쁜 모습은 함께 죽는 것이 아닐까?


우리 친정 엄마는 일평생 일하지 않고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자신을 때리고 살림을 때려 부수고 밥상을 뒤엎고 잔소리를 해대던 아버지가 죽자 훨훨 날아갈 것 같다고 했다. 얼마나 좋았던지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그만 사고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우리들에게 말했다.

"글쎄. 안 좋은 모습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엄마 좋아하는 참외를 사들고 저기 문을 들어서던 모습만 훤하니 보이지 뭐냐?"

또 이런 말도 했다.

"애를 10여 명 가까이 낳았으니, 지금 살아있는 애들은 5명뿐이지만,  젊어서는 꽤나 부부 정이 있었던 거네.  너희 아버지가 그때는 그렇게 술로 망가지기 전이었으니까."


하긴 나도 그랬다. 나는 아버지가 학교 그만 다니라는 말과 늘 술에 쩔어있는 모습에 그만 진저리가 나서,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으면, 어서 빨리  죽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정작 복음을 받고 활짝 웃으며 숨을 거두셨을 때, 아주 많이 울었다. 아버지가 선산에 묻힐 때도 구슬프게 목놓아 울었다.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해 드리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또한 내게 절대적인 사랑을 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때는 오히려 담담했다. 역시나 임종의 순간에 복음을 받고 돌아가셨기에 이다음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기도를 드렸다. 선산에 묻을 때에도 아직 어린 아들을 포대기에 싸서 등에 업고 무덤 주변을 서성거렸다.

"할머니가 무지 예뻐하시던 손주도 같이 왔어요."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라고 한다. '동전의 양면, 종이 한 장 차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가까이 있는 것이 삶과 죽음이다.


일평생 고마운 사람으로 사느냐? 해로운 사람으로 사느냐? 죽일 만큼 미운 적으로 사느냐? 그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일까?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우리 힘으로 제어가 안 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에 이해의 득실을 따져서 어떤 사람은 우군으로 또 어떤 사람은 적군으로 삼는 것은 우리스스로 선택해서 정하는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 것은 사울왕에 대한 이런 태도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이 항상 다윗 편인데, 이 세상 누구가 감히 다윗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나라의 왕이라도 감히 하나님과 대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 그것이 바로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활노래'를 지어 부르며 애도한 이유일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다윗을 닮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나를 해롭게 한 사람이라도 용서한다. 그의 잘못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갚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삶 가운데 늘 이런 고백이 넘쳐나기를 기도드린다.

"내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다."

현대어성경 사무엘하 1장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