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홈커밍데이 : <2025 다시, 이화에서>
해마다 이화에 가는 일은 즐겁다. 수원으로 이사오고부터 거리가 꽤 멀어져서 가는 일이 쉽지 않지만, 날짜를 기다리다가 집을 나서는 마음은 언제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소녀의 마음이 된다. 학교 다닐 때 친했던 친구 중에는 연락이 안 되는 친구들도 있고, 연락은 되지만 동창 모임에 안 나오는 친구들도 있다. 아마도 친구들이 그러는 데는 졸업 후 학교 가는 일에 별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나는 다르다. 이화여고도 이화여대도 정말 뜻밖에 다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고에 진학할 당시 우리 집은 몹시 어려웠다. 부모님은 맏딸인 내가 상고에 진학해서 빨리 졸업해서 집안 살림을 도와주길 바랐고, 나는 인문계고교에 진학해서 대학에 가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상고에 가는 것은 대학을 포기하는 것과도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기왕 대학을 못 갈 거면, 여고라도 좋은 데 떨어졌다고 하자.'
나는 부모님 허락도 받지 않고 공동학군에 원서를 냈다. 그리고 이화여고에 배정되었다.
내가 여고 진학할 당시에는 이제 막 고교 입시가 없어진 지 몇 해가 안 된 시점이었고, 추첨을 통해 다닐 고등학교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서울 4대 문 안에 있는 명문 고교들이 공동학군이어서 일반학군보다 선지원을 할 수 있었다. 공동학군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일반학군 고교에 배정되었다. 둘 다 추첨이긴 했지만, 운이 좋으면 공동학군에 배정될 수가 있었다.
우리 여중학교에서 단 2명이 이화여고에 배정되었는데, 그중 한 친구는 운동 특기자라 추첨 없이 들어왔고, 나는 유일하게 추첨을 통해 들어왔다. 운동 특기자 친구는 우리 동네 살았고 같은 반도 해서 나와도 친했던 친구이다. 당시에는 이화여고 들어가는 게 그렇게까지 어렵고 복잡한 줄은 몰랐다. 지나고 보니 그랬다.
이화여고에 다니면서는 더 어려웠다.
"여자 공부 많이 해봐야 쓸데없으니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다녀라."
날마다 새벽에 소줏병을 들고 와서 마시며 내 옆에서 채근해 대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도시락도 못 싸가지고 아침 일찍 학교에 가곤 했다.
"학교 가면 천국, 집에 오면 지옥!"
여고시절을 한 문장으로 말해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다.
나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학교를 그만 둘 생각에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여고 2학년 말에는 기말시험도 치지 않았다. 유급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집 형편을 아시는 교목 목사님과 선생님들의 배려로 나만 따로 추가 기말시험을 쳤고 무사히 진급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사연이 있으니 내게 이화여고는 다른 그 누구에게 보다도 얼마나 더 소중한 곳이겠는가? 문예반에 밀알선교회 봉사 동아리도 하면서 뜻깊은 여고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졸업 후 이화여고에 갈 때마다 내게 주어진 행운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고마운 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참으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행복한 시간이다.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일 역시 쉽지 않았다. 나는 졸업하던 해에는 대학입시 원서도 써보지 못했다. 설사 합격을 한다 해도 등록금이 없어서 다니지 못할 게 뻔했다. 그때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그렇게 가난 때문에 대학진학을 못 하던 이들이 종종 있었다. 나는 집에서 아무도 오지 않은 졸업식을 혼자서 하고, 그 후 직장에도 다니지 않았기에 유야무야 한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첫 해에는 다행히 교회에는 나가고 있어서 공동체는 있었는데 사정이 그렇다 보니 2년 차부터는 교회에도 안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의 도움으로 종로학원을 다니게 되어 좋은 성적을 받아 명문대학에 원서를 냈지만 입시정책의 급격한 변동으로 두 번의 대학입시에 실패하게 되었다. 본고사가 폐지되고, 수십 장까지 원서를 쓸 수 있는 복수지원으로 허수지원이 많아 한 곳으로 몰리고, 다른 곳은 미달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비슷한 명문대 두 곳에 원서를 넣었는데, 하필이면 몰리는 대학 몰리는 학과에 면접을 보러 가서 떨어지고 말았다. 나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이들도 내가 지원한 다른 대학이 미달되어 좋은 학과에 합격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네가 대학 갈 팔자가 있나 보자."
결국 나는 점술에 의지하며 살던 엄마 손에 이끌리어 미아리 점집까지 가게 되었는데, 용하다는 점쟁이 하는 말이 내 팔자에는 대학이 없단다. 더는 부모님을 이길 수 없어서 대학을 포기하고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 대학입시 책을 다 없애고 아예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해 대학입시가 다가오자 나는 무조건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성적은 이대 갈 정도는 나와서 1 지망부터 3 지망까지 지원을 하고 원서를 냈다. 글이 쓰고 싶어서 문학이 공부하고 싶어서 국문과를 1 지망으로, 2 지망은 경영학과, 3 지망은 교육학과를 써넣었다. 당시에 국문과에 계신 이어령 교수님에게 면접을 보았는데, 나는 국문과에 아슬아슬하게 떨어지고 경영학과에 합격하였다.(지금은 경영학과 합격선이 훨씬 더 높지만 당시에는 국문과 합격선이 살짝 높았다.) 나는 1년 동안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 직장에 다녔기에 이대에 합격하자 우리 부모님은 내가 천재인 줄 알고 입학금과 등록금을 주셨다.
"등록금은 딱 한번뿐이다. 네가 벌어서 다녀라"
그렇게 나는 이경인이 되었다. 졸업하고 4년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대학생이 된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부전공이나 복수전공으로 국문학을 공부하려고 국문과 과목을 21학점이나 들었다. 그런데 경영학과 과목에서 학점이 잘 나오지 않아 중간에 부전공을 포기했다. 제도적으로 평균 A학점 이상 성적이 좋아야 부전공과 복수전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수없이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에 다녀야 했고 어려운 경영학 공부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겨우 평균 B학점을 받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나는 이대에 갈 때마다 옛 생각을 한다. 어긋나는 순간순간들이 다 이미 계획에 있었던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계획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내 삶에 계획을 가지고 운행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다. 그 후에도 나는 전공을 달리하여 대학원을 두 개나 다녔으니 미아리 점쟁이의 말은 전혀 맞지 않았다.
이화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감사가 넘친다. 이화여고, 이화여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내게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2025년 이화 홈커밍데이는 이경 30기 후배들이 주관을 했다. 졸업 후 30년이 되는 후배들이다. 소개하는 시간에 보니까 졸업해서 바로 입사해서 지금까지 쭈욱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이들도 많다. 다양하게 전공을 바꾼 이들도 있고, 열심히 일했으나 자녀를 낳아 육아에 전념하는 이들도 있다. 삶의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가 다 귀하고 사랑스럽다.
은사님들과의 만남, 선후배 간의 만남, 동기들과의 끈끈한 우정, 맛난 만찬 등 늘 이경 홈커밍데이는 푸짐하다.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느껴지는 소중한 행사이다. 앞으로도 매년 이화의 행사 때마다 부지런히 참석을 할 예정이다. 내게 아름다운 이화의 추억은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는, 넉넉하고 든든한, 만년 예금통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