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은 태어나지 않고, 설이 아래로 둘째, 셋째 딸이 연이어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이제 아예 집에 들어오지를 않고 노름판에 눌러 붙어 있습니다. 설이 아버지가 돈을 긁어모은다는 소문이 돌자 와룡리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노름판에 하나씩 둘씩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마을의 남정네들이란 남정네들은 하나같이 다 바쁜 농사철에도 일손을 놓은 채 있는 가산을 팔아 주막 노름판으로 몰려듭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누구네 집 논이 넘어갔다느니, 집이 넘어갔다느니 하는 말들이 하나씩 붙어서 온통 와룡리 사람들의 입에는 노름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이 집 저 집 굿을 하는 집들이 늘어나고 먹을 것이 없어서 동냥을 하러 다니는 집도 늘어납니다.
“아이고, 어저께 말이여, 풍으로 누워있던 최영감이 있는 전답을 다 팔아 굿을 해놓고 조금 차도가 있는가 했다드만 그예 숨을 거두었다니께. 어쩌끄나 잉? 며느리가 가진 것도 없이 홀로 되앗으니께 말이제 잉?”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하는 것은 가녀린 아낙네들뿐입니다.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들을 잡아 뜯으며 논에서 김을 매거나, 농약 통을 휘청거리는 허리에 짊어지고 약을 뿌리고, 뙤약볕을 쬐며 하루 종일 산밭을 일구는 등, 와룡리의 농사일을 전담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낙네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유일하게 노름판에 빠지지 않고 묵묵히 일을 하는 집이 있다면 설이네 옆집 박씨입니다. 박씨는 체격이 우락부락하게 생긴 데다가 팔다리에 알통이 불끈불끈한 게 볼만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조금 모자란 데가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좋아도 좋다고도 못하고 싫어도 싫다고도 못하며 항상 벙글벙글 웃음을 흘리고 다닙니다. 누가 되게 일을 시켜도 군소리 한번 안 하고 억세게 일을 해주는 박씨만이 노름판에 가지 않고 농사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설이엄마는 박씨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가을 농사를 거두고는 행상에 나섰습니다. 친정어머니가 하는 제수품 가게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머리에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면서 파는 것입니다. 읍내 장에 한번 가기가 쉽지 않은 산골마을 사람들은 설이 엄마가 이고 가서 파는 미역이며 멸치, 오징어포 같은 것들을 쌀이나 보리, 콩 같은 것을 주고 삽니다.
저녁에 설이 엄마가 집에 들어오면 방바닥에 곡물들을 수북이 부어놓고 되질을 합니다.
“엄니, 오늘은 찹쌀 닷 되 값은 이문이 났어요.”
“그랴, 힘은 들어도 그게 나은 벌이제 잉? 느그 친정어매가 가게를 허니께로 이문이 많이 남는 것이제 잉?”
미동할머니는 아직 젖도 떨어지지 않은 막내까지 해서 세 손지 딸을 보면서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설이엄마가 곡물 되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합니다.
“젊어 고상은 돈 주고도 못 산다고 허니께, 지금 고상을 고상으로 여기들 말고 한번 열씨미 살아보자 잉?”
설이엄마는 미동할머니의 격려에 힘을 얻고 물건과 곡물들을 이고 다니느라 먹먹해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봅니다. 제법 피로가 풀리는 것 같습니다.
“아이고 엄니, 이를 어쩌면 좋아요?”
어느 날 보니, 설이엄마가 행상을 해서 벌어들인 돈을 차곡차곡 모아둔 보리 항아리가 텅 비어버린 것입니다.
“아이고, 아까 점심 먹을 정께 아범이 집에 왔다 갔는디, 그것에 손을 댔는 갑다. 어쩐 디야.”
미동할머니가 현기증이 나는 듯 손사래를 치며 비틀거립니다.
“아이고, 엄니, 정말 큰일 났어요. 이야길 듣자니까 진짜 노름꾼들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느라고 처음엔 아범에게 돈을 잃어줬다는데, 인자는 하나씩 둘씩 우리 마을 사람들의 전답이며, 집들을 털어가고 있다고 해요.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도 않고 노름판에서 나올 생각을 않으니 어쩌면 좋아요?”
겨울 농한기 동안 매일매일 다리품을 팔아서 벌어 모은 돈을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리고 나니 설이엄마는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와룡리 부잣집으로 시집을 오니까 고생 안 하고 살 거라고 친정엄니가 그러더니만 다 부질없는 일이 되어 버렸네. 인제 이러고 어떻게 살아갈까?”
설이엄마는 너무나 신세가 처량하여서 비틀거리며 마당 밖으로 나옵니다.
성큼성큼 마당의 우물로 걸어가서 물을 길어 올립니다. 두레박에 하늘의 달과 별들이 수북이 내려와 앉습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하는데, 내 인생에는 언제 볕이 들꼬?”
설이엄마는 우물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립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우리 설이 아빠 노름 좀 끊고 새 사람 되게 해 주세요."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이름이 뜬금없이 정답게 불러집니다.
설이엄마는 다시 한번 우물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하늘을 우러러 소원을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