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장편소설 [태고의 시간들]을 읽는다. 이 책의 주제는 '연민'이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폴란드의 여성작가인데,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작가라고 한다. 그 누구라도 이 작가에게서는 '연민'의 대상이 된다.
'지금 현재'는 '태고' 이후 얼마 만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태초'라고도 하는 '태고'라는 이름!
'태초'라는 말보다 '태고'라는 말이 어째 더 오래된 것 같고, 더 고풍스러운 느낌이 난다.
그러나 이 책에서 '태고'는 '시간'의 이름이 아니라 '공간'의 이름이다.
"'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태고의 시간들]을 읽다 보니 묘사에 묘사로 이어지는 문장들에 휘감겨 소설 속의 세계가 나를 강렬하게 포옹하고 있는 듯한 달콤함에 파묻힌다. 마치 촉촉한 사랑을 나누는 연인처럼.
한 사람 한 사람 소설 속 인물들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아니다. 하나의 동물, 식물, 또 하나의 사물들의 시간도 다루고 있다. 소제목별로 다른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이야기로 쭈욱 이어진다.
초반부에 나오는 '크워스카의 시간'은 도저히 아름다울 수 없는 여인의 이야기인데, 원시의 '태고' 마을에서 욕망으로 살아가는 한 여인의 처연한 아름다움이 혼돈 속에 수묵화로 그려진다. 자연 속에서 혼자 죽을 것 같은 산통을 겪으며 목숨을 걸고 누구의 아기인지도 모르는 아기를 낳는데 죽은 아기가 태어난다. 그 아이를 자연 속에 파묻고 크워스카는 일어선다.
이 책은 가상과 현실이 섞여있는 시간과 공간과 인물과 동식물과 사물들을 다루고 있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는다. 전쟁이 일어나고 끌려가고 죽는다. 사랑하고 살고 헤어지고 죽는다.
태고의 시간은 비극적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태고는 폐허가 되고 모두가 다 죽는다. 3대 손녀인 아델카는 다른 지역에 가서 살다가 잠시 태고를 찾아오지만 곧 다시 떠난다.
'태고'는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라고나 할까? 태어나고 사랑하고 살고 죽고, 그리고 또 대를 이어 살아간다. 생명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전쟁이나 노화나 질병이나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코로나19 비상 중에 읽은 책이라 그런지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은 더욱 절박하게 다가온다. 인간이나 동식물이나 사물도 그 언젠가는 모두 다 죽는다. 어떻게 사느냐 보다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든 장애를 가진 몸으로 태어나든, 평화의 때를 살든 전쟁과 질병의 때를 살든,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때로는 노력해서 무엇을 이룰 수도 있다. 부라든지 예술이라든지 직업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이런 이름으로 부르는 꿈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종국에는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된다.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모두 죽고 '자손'이라는 씨를 남긴다.
초반에 읽은 크워스카의 시간이 이 책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의 비약을 해본다. 크워스카는 난산의 고통을 겪고 태어난 죽은 아기를 차디찬 땅 속에 파묻는다. 고통의 극한에서 성경의 인물 욥이 "어찌하여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았던가!" 죽음을 간절히 원했던 것처럼 죽어 태어난 아기가 가장 복된 것일까?
올가 토카르추크는 생명과 죽음을 노래하지만, 대를 이어 이어지는 씨앗을 이야기하지만,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상, 영생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유한한 인생이 비극이어도 무한한 영생은 희극일 수 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태고'라는 공간과 시간 저편으로 돌아가서, 그곳 본향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