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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축친놈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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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재 Nov 08. 2024

낭만 한도 초과

 바르셀로나에 푸욜이 있다면 리버풀에는 이 남자가 있다. 2000년대 중반,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금발을 휘날리던 페르난도 토레스, 일명 빨토와 함께 리버풀의 팬들을 양산했던 다재다능한 전천후 미드필더.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 '리버풀의 심장'. 10여 년 가까이 지속된 리버풀의 암흑기에도 팀을 떠나지 않은 센터서클의 사령관. 리버풀이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구심점 내지 버팀목의 역할을 해준 이 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주장, 더 캡틴 스티븐 풋볼 제라드'


 스티븐 제라드는 유스 시절부터 리버풀에서 시작해서 프로 계약도 리버풀에서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라드는 보통 중앙 미드필더의 모습이지만 데뷔할 때 포지션은 측면 수비수였다. 이때부터 멀티 포지션의 낌새가 느껴졌다. 중앙으로 기용되기 시작한 것은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우연히 찾아온 기회였다. 이는 그가 주전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주전이 된 제라드는 팀의 중앙 수비를 담당하던 새미 히피아의 뒤를 이어 23살부터 리버풀의 주장으로써 활약했다. 이때 제라드는 팀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했고 은퇴를 하지 않은 선배의 주장 완장을 넘겨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히피아가 괜찮다며 할 수 있다며 완장을 넘겨주었다. 본인은 걱정을 했지만 이는 팀을 위한 최선의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제라드는 훗날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불리는 AC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캡틴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 


 04/05 시즌 리버풀과 AC밀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이스탄불에서 열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AC밀란의 우세를 점쳤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밀란은 당대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젠나로 가투소', '히카르두 카카', '안드레아 피를로', '클라렌스 셰도로프' 등 최정상급 조합으로 미드필더를 꾸려 놓았고 공격수는 '무결점 스트라이커 셰우첸코''아르헨티나 폭격기 크레스포'였다. 그리고 이들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는 현재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감독인 '카를로 안첼로티'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예상대로 밀란이 경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밀리던 리버풀이 정신을 차린 시간은 전반 종료 직전인 45분이었고 스코어 보드의 점수를 보니 3:0이라고 적혀 있었다. 패색이 짙어진 리버풀은 밀란 선수들과는 상반되는 표정으로 라커룸에 들어간다. 전반이 끝나고 들어간 리버풀의 라커룸에서는 베니테즈 감독이 선수들의 떨어진 사기를 다시금 올렸다. "가라, 가서 영웅이 될 기회를 잡아라" 이 말을 들은 제라드는 영웅이 되기로 한다. 


 전반전이 끝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경기가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후반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둘씩 바뀌었다. 후반이 시작되고 제라드는 빠르게 승부의 불씨를 살리는 추격골을 넣었다. 그는 주장답게 포기하지 않고 골을 넣고 팬들을 향해 두 팔을 높게 올리며 더 폭발적인 응원을 요구했다. 서늘했던 이스탄불의 공기가 뜨겁게 바뀌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말라는 팬들의 함성을 받은 리버풀은 2분 만에 한 골을 추가하고 순식간에 스코어를 3:2로 만들었다. 리버풀은 기세를 몰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밀란을 상대로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 순간 박스 안쪽에서 들리는 심판의 휘슬 소리. 제라드가 PK를 얻어낸 것이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제라드의 옆으로 그의 중원 파트너 사비 알론소가 키커로 나왔다. 모두가 숨을 죽인 순간, 알론소의 슈팅이 키퍼의 선방에 막히며 밀란이 위기를 넘기는 듯했으나 리바운드된 볼을 그대로 밀어 넣으며 3:3 동점. 3:0부터 3:3까지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단 6분이었다. 


 정규시간 내에 추가 골을 넣지 못한 양 팀은 그대로 연장전에 돌입했고 승부차기까지 하게 되었다. 이어진 승부차기의 결과는 '춤추는 두덱'이라는 뜻의 '춤덱'을 앞세운 리버풀의 승리였다. AC밀란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밀리던 경기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유럽 최정상의 자리에 위치한 순간이었다. 여담으로 제라드의 리더십은 이스탄불에서 멈추지 않았다. 바로 다음시즌에 있었던 FA컵 결승에서도 본인만의 리더십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때 리버풀은 부상 및 이적으로 주전 선수들이 상당히 많이 이탈한 시즌이었기 때문에 힘든 경기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결승전에서 2골 1 도움을 기록하며 또 승부차기까지 끌고 간다. 그리고 결국 승리해서 또 한 번 우승컵을 추가했고 이때 그의 평점은 10.0, 한글로 표현하면 '완벽'이었다. 


 컵대회에서 굵직한 업적을 쌓아가던 제라드도 한 가지 이루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프리미어리그 우승. 다른 메이저 팀들은 제라드의 이 열망을 이용해 영입을 시도한다. 같은 리그에서는 맨유와 첼시가 있었고 다른 리그에서는 레알 마드리드가 그를 노렸다. 첼시와의 이적설 당시 '무리뉴 밑에서 뛰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알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함께 이스탄불의 기적을 써 내려갔던 중원의 파트너 사비 알론소가 레알로 이적했기 때문에 다른 이적설 보다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실제로 제라드는 알론소의 이적을 보고 "절망스럽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라드의 심장의 나침반은 언제나 리버풀을 향해 있었다. 숱한 이적설이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잔류했다. 


 이렇게 꿋꿋하게 버티다 보니 리버풀에게도 리그 우승의 기회가 왔다. 시즌 막판까지 우승 경쟁을 이어갔고  타 팀보다 리버풀이 우승할 가능성이 조금 더 높게 점쳐졌다. 하지만 충격적 이게도 시즌 종료를 앞둔 경기에서 다른 선수도 아닌 제라드가 실수를 하게 되었다. 그 실수는 실점으로 이어졌고 경기에서 패하게 되며 승점을 잃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실수 덕분에 리버풀이 그토록 염원하던 리그 우승 트로피는 다음번을 기약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 차에서 자살을 생각할 정도의 죄책감으로 힘들어했다. 이 기회가 떠나가자 또 팀을 대표하던 선수들이 떠났다. 시간이 지나 에이징 커브가 온 제라드는 심각한 폼 저하를 겪으며 27년간 몸 담았던 리버풀을 떠나기로 했고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잉글랜드와 리버풀을 대표하는 중앙 미드필더이자, 흩날리는 꽃가루 속에서 트로피를 가장 맛있게 들었던 캡틴. 전술 이해도가 너무 높은 나머지 수비형 미드필더부터 세컨드 스트라이커까지 소화하던 진정한 의미의 육각형 선수. 나는 아스날의 팬이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터지던 그의 대포알 중거리 슛과 이후에 관중들 속으로 들어가 팬들과 함께 열광하는 모습은 잊을 수 없다. 


 “내가 죽으면 나를 안필드에 묻어달라” - 스티븐 제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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