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는 숙녀가 필요로 할 때 떠나지 않습니다" 이 무슨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대사인가. 하지만 이것은 영화 대사가 아니다. 놀랍게도 영화배우가 아닌 한 축구선수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유벤투스가 '칼초폴리'사건의 징계로 하부 리그 강등이라는 처분을 받았을 때 팀을 대표하던 스타 선수가 당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왜 저런 표현을 사용했는지 알게 된다면 미치도록 진한 낭만을 느낄 수 있다. 유벤투스의 애칭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Old lady'이다. 즉, 그가 위기에 처한 팀에게 했던 영화 같은 말은 본인을 신사로 팀을 숙녀로 표현한 것이다. 팀의 상징성에 빗대어 표현을 하다니, 어찌 축구선수가 이렇게까지 시적일 수가 있는가. 별명까지 이탈리아의 '판타지스타'였던 '알렉산드로 델 피에로' 마치 이탈리아의 유명 영화배우 같은 이름이다.
델 피에로는 '칼초폴리'때 팀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던 유벤투스의 의리남 5명 중 한 명이다. '칼초폴리'는 책의 앞부분에서 거론한 부폰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때 의리남 명단으로는 '잔루이지 부폰', '다비드 트레제게', '파벨 네드베드', '카모라네시'가 있다. 이 의리남들은 이적이 아닌 잔류를 선언하며 힘을 모아 '승부조작'으로 빛이 바래버린 팀의 영광을 되찾기로 한다. 이들 중 체코의 양발잡이 네드베드는 "유벤투스의 팬들과 녹색 잔디만 있다면 그게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이제부터 저에게 세리에 B는 챔피언스리그입니다"라는 말을 전하며 팀에 충성심을 보였다. 하지만 멘트대결에서 대진운이 좋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감성적인 측면에서 이탈리아 특유의 치즈 같은 발언에 밀려버렸다. 역시 현지인의 감성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자국 사람인 것 같다.
이때 모든 선수들이 떠나지 않고 남았다면 낭만 있는 멤버들로 남았을 텐데 아쉽게 몇몇 스타 선수들은 이적을 감행했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의 커리어를 위해 팀을 떠난 선수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계약서에 꼭 남아야 하는 조항이 있던 것도 아니고 원래 사회나 스포츠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니까. 오히려 본인의 생계와 관련된 직장에서 낭만을 찾아 자리를 지킨 것이 더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단, 떠난 선수가 있기에 남았던 선수들의 충성심이 더 빛나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패트릭 비에이라', '파비오 칸나바로' 등 제법 이름값이 높은 스타 선수들은 빠르게 이적을 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칸나바로는 '간다바로'라는 별명을 얻으며 국내 팬들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
다행히 유벤투스는 한 시즌만에 세리에 A로 복귀에 성공했지만 약간의 암흑기를 거치긴 했다. 주축 선수들이 빠져나간 것도 있고 연이은 성적부진으로 구단 재정이 악화되기도 했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팀은 고 주급자에 해당되었던 델 피에로에게 연봉삭감을 제시했다. 팀의 상징이자 리빙 레전드였던 그는 본인보다 팀을 먼저 생각하며 순순히 이를 받아들였다. 왜 그가 유벤투스의 10번이자 주장 완장을 달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팀을 위해 자신의 연봉을 삭감한 델 피에로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해당 시즌 유벤투스는 콘테 감독과 함께 전무후무한 무패우승 신화를 창조한다. 특히 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 무패우승을 확정 짓는 결승골을 기록한 사람이 델 피에로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틀림없이 하늘이 그를 도운 것이다. 그는 이날 교체되는 순간에 신사다운 행동에 방점을 찍었다. 기립박수를 보내주는 팬들을 위해 경기장을 크게 한 바퀴 돌며 전 관중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팀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인 그는 유벤투스 역사상 최장 기간 주장을 역임했고, 통산 '705경기 290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유벤투스 역대 최다 득점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여담으로 부폰이 말년에 다시 유벤투스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클럽 역대 최다 출전자 명단에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처럼 많은 시간을 유벤투스에 바친 로맨틱한 신사에게 구단은 지금까지의 공로를 인정하며 선수시절 사용했던 '10번'을 영구결번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하지만 한 팀의 에이스를 상징하는 10번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는 이유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델 피에로는 그야말로 실력, 인성, 낭만, 스타성 등 모든 것을 다 갖추었던 축구계의 완성형 선수였다. 그는 팀을 떠나며 팬들에게 "이제 끝입니다. 저와 유벤투스와의 계약은 오늘로써 막을 내립니다. 전 어떤 후회도 회한도 없습니다. 내일부터 전 더 이상 유벤투스의 선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 언제나 여러분들 중 한 명으로 남아있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여러분 모두들 고맙습니다, 알렉산드로 델 피에로가"라는 연서와도 같은 로맨틱한 말을 남기고 손뼉 칠 때 유벤투스를 떠났다. 화려한 테크닉으로 볼을 다루던 이탈리아의 판타지스타가 그라운드를 떠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팬들의 가슴속에는 그가 남아있을 것이다.
"그가 곧 유벤투스이며, 유벤투스가 곧 델 피에로다" - 루이스 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