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힘든 세상살이 속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길 바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는 축구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개념이다. 게다가 다른 리그도 아닌 프리미어리그의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매 시즌 잔류를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 팀이, 쟁쟁한 빅클럽들을 제치고 우승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이러한 이야기를 영화의 대본으로 쓴다면 이것은 기적을 넘어 사기에 가까운 행위이다. 때문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이들이 우승을 할 확률은 5000분의 1. 즉, 0.02%라는 이야기다. 이는 동전을 하늘로 던졌을 때 옆으로 동전이 서있을 확률이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확률이지만 잉글랜드의 한 팀은 "축구공은 둥글다"라는 격언을 무려 한 시즌 내내 증명하며 보여주었다.
'여우굴 입장'
대부분의 약팀들은 경기를 지배한다기보다 먼저 수비하고 기회를 틈타 간간히 역습을 하는 플레이를 선보인다. 본인들도 원하는 축구가 있겠지만 상위 리그에 잔류하는 것이 1차 목표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실리적인 운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수비 후역습'을 약팀의 생존 방식이 아닌 유니크한 팀 전술로 정착시킨 감독이 있다. 그는 바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15/16 시즌을 앞두고 레스터시티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한 라니에리에게 팬들은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레스터는 팀이 잔류만 하더라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로 직전 시즌도 겨우 턱걸이로 잔류에 성공했던 터라 팬들은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보다는 잔류 걱정이 앞섰다.
시즌이 시작되고 뚜껑을 열어보니 직전 시즌 강등권 경쟁을 하던 팀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경기력을 뽐냈다. 그렇게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 '제이미 바디'의 연속 골은 계속되었고, 리그를 대표하는 빅클럽들은 이상하리만큼 부진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어느 리그를 보아도 초반 돌풍의 팀은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UTU, DTD'라는 말이 진리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이것은 'UP TO UP, DOWN TO DOWN'의 줄임말인데 올라갈 팀은 결국 올라가고 내려올 팀은 결국 다시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반 여우들이 일으키는 돌풍이 언제나처럼 금방 지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프리미어리그의 전체적인 역사를 되돌아봐도 돌풍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레스터가 계속해서 연승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기적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직전 시즌 강등권을 헤매던 팀이 갑자기 최상위 리그에서 우승을 한다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돌풍이 오래간다고만 생각했다. 우승 확정이 되기 직전까지도 아무도 믿지 않았던 라니에리의 각본. 라니에리는 "지금까지는 꿈을 꾸기만 했지만 이젠 꿈을 현실로 만들 시간이다"라며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가 여우들과 함께 만들었던 작은 돌풍은 시간이 지날수록 큰 폭풍이 되었고 결국 사라지지 않으며 잉글랜드 전역을 덮쳤다. 그렇게 레스터시티는 상상 속에서나 보던 기적을 보여주며 영화를 실화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실화는 시간이 지나 여우들의 신화가 되었다.
이 여우들의 신화는 한 명 한 명의 서사를 알게 된다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맨유의 전설적인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의 아들'인 '카스퍼 슈마이켈'은 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본인의 힘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지워냈다. 레스터의 최종 수비를 담당했던 '웨스 모건'과 '로베르트 후트'는 신체적인 전성기가 지났음에도 베테랑의 면모를 보여주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맨유의 유스였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임대를 전전하다 레스터시티로 입단한 '대니 드링크워터'는 '은골로 캉테'와 함께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중원 조합을 만들어냈다. 프랑스 4부 리그의 평범한 윙어였던 '리야드 마레즈'는 무려 잉글랜드 최상위 리그에서 인정하는 드리블러가 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7부 리그부터 시작해 한 공장의 노동자로 근무하며 축구를 시작했던 '제이미 바디'는 11경기 연속골이라는 프리미어리그 대기록을 세우며 조금은 늦었지만 확실하게 꽃을 피웠다. 참고로 바디가 공장에서 일을 하지 않고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10년이다.
마지막으로 여우들의 수장인 라니에리는 모두가 이야기하는 명장이 아니었다. 그는 나폴리, 피오렌티나, 유벤투스, 첼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발렌시아 등 유럽의 여러 빅클럽을 거쳐왔지만 1부 리그 우승 경력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위기의 팀을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능력은 타고났었으나 그 이상으로 유의미한 성적을 낼 수 있는 감독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 '무관 DNA'를 가진 감독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선수부터 감독까지 각자의 모두 다른 이야기가 섞여있기에 더 감독적이었다.
이렇게 신화를 창조한 여우들은 아쉽게도 다음 시즌부터 공중분해를 당하게 된다. 강등권 팀을 우승까지 끌고 간 젊은 재능들을 다수의 빅클럽이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중원을 책임지던 드링크워터와 캉테는 첼시로 이적하게 되고 측면을 파괴하던 마레즈는 맨체스터 시티로 향했다. 중요할 때마다 한 건씩 해주던 일본의 오카자키 신지는 계약기간이 끝나자 FA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팀의 주축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마침내 여우 군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바디에게도 매혹적인 제안이 오게 된다. 당시 아스날을 이끌던 벵거 감독의 제안이었다. 단순 영입설이 아니라 실제 공식적으로 오퍼를 했다. 레스터는 선수를 지키고 싶었지만 선수의 커리어도 중요했기에 무턱대고 남아달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이미 다른 선수들은 전부 떠난 후였으니까. 바디는 본인의 커리어를 빛내줄 팀과 지금의 본인을 만들어준 팀 사이에서 갈등을 하게 된다. 제법 오랜 시간을 고민했던 바디였지만 끝내 의리를 택했다.
이때 제안을 거절했던 그는 아직까지 레스터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다. 두 번의 기적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 영화의 주인공도, 그를 빛나게 했던 조연들도, 대본을 썼던 감독도 모두 바뀌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한 팀이 승리하고 약한 팀이 패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면, 기적이 없다면 우리는 이토록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스포츠를 '축구'가 아닌 '공놀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화 같은 순간들로 현대 축구판에 사라져 가던 낭만의 불씨를 되살렸던 여우 군단을 추억하며 제2의 레스터시티를 기다린다.
각본 :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주연 : 카스퍼 슈마이켈, 대니 드링크워터, 웨스 모건, 로베르트 후트, 제이미 바디, 앤디 킹, 마크 올브라이턴, 은골로 캉테, 제프리 슐럽, 대니 심슨, 오카자키 신지, 리야드 마레즈, 크리스티안 푹스
조연 : 리치 더라트, 다니엘 아마티, 리암 무어, 안드레이 크라마리치, 레오나르도 우조아, 네이선 다이어바실레프스키, 벤 칠웰, 마크 슈워처, 괴칸 인러, 조 두두
제작 지원 : THE FOX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