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불점(三不粘)

끊임없이 흘러가요

by 동그라미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을 한국인답게 세 가지 꼽아보자.

1등,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 안녕하세요, 저는 동그라미라고 합니다.

2등, “나이는요?” — 아, 저는 33세에서 35세 정도 됩니다. 요즘 나이 법이 바뀌어서 혼란스럽죠? 91년생이에요.

그러면 나는 고작 두 마디 정도 한 것 같은데 상대방은 직접 알려준 이름과 나이만으로도 나의 대략적인 성격과 표정, 직업의 결까지 짐작해낸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답변을 예상한 듯이 마지막 질문을 건낸다.

3등, “어디서 오셨어요?” 지금까지 잘 답변했으면서 꼭 이 질문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나는 어디서 왔다고 해야할까. 나를 어디 출신이라고 하면 좋을까.


1991년 10월 11일, 엄마의 친정인 서울 구로구의 어느 산부인과에서 나는 태어났다.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한다면 내 고향은 서울이다. 그러나 외가에서는 1년도 채 못 살다 친가가 있는 경상남도 산청으로 옮겨 지내게 됐고, 본적도 아빠가 산청에서 신고했기에 행정적으로 고향을 따지면 내 고향은 산청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1년을 못 채우고 아빠가 박사 과정을 밟던 진주로 와 이윽고 부모님과 나로만 이루어진 가구가 된다. 진주의 그 월세방에서 기억이 쌓여 추억이 될만큼 지냈다면 그곳을 유년기의 고향이라 할 수 있지도 않을까? 그렇지만 두살 터울의 동생이 만 두 돌을 치룰때쯤 우리 가족은 또 떠난다. 아빠의 유학길을 따라 미 대륙을 동에서 서로 물살을 타듯 횡단한다. 이때까지의 기억은 어떤 도움을 받아도 거의 없지만 미국에서 지내던 시절부터는 앨범의 도움을 받아서, 또 앨범이 없는 날들도 부분히 선명하다.


동네의 무료 수영장에서 동생의 몽고반점 때문에 아동 학대로 오해 받아 영어가 부족한 모녀 삼인방이 온 몸으로 물을 쭐쭐 흘리며 경찰서로 끌려갈 때. 이사를 온지 얼마 안돼 혼자 지키던 놀이터 모래밭이 꼭 그만한 사막인 듯 적막함에 짓눌려져 버틸 때. 커뮤니티 센터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할로윈 호박을 파고, 미국을 방문한 친척들과 좁은 차에 구겨져 앉아 국립 공원에 놀러 갈 때도. 어린 나이라 표현하진 못했지만, 내 안의 일부분은 이 세계에서 우리 가족만이 또렷하게 이방인이고, 끊임없이 어딘가로 흐르고 있다는 걸 체화했다. 대부분은 흐릿하게 행복하고, 가끔씩은 선명하게 불안해하면서도 그 때 마다 같은 차에 타고 있는 우리만이 바틋하게 등을 대고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잠깐씩 그 등을 때고 내 등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돌아보는 순간들이 사진 속에 남아있다고. 그래서 앨범을 넘길 때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확인하며 웃었던 순간들을 골라낼 수 있다.


7살이 되던 초봄, 아빠의 유학 일정이 끝나 한국으로 돌아갔다. 유학이 끝나자마자 취업이 된건 아니라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 경상남도 사천에 잠시 머물렀다. 그 곳에서 모두가 우리와 비슷하고 남들 또한 우리를 다르게 대하지 않는 곳을 처음 인지했다. 그러다 아빠의 교수 임용을 따라 전라남도 순천으로 이사를 갔고, 그 곳에서 10년을 지냈다. 그 때 쯤 되서야 순천 밖의 누군가가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하면 주저 없이 순천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진짜’ 순천 사람들을 아는데 나는 모르는게 있다는 걸 알아 챌 때면 ‘내가 찐은 아니구나’ 자조했다. 나는 이방인이 되는 데는 꽤 민감하면서도, 어떤 집단의 일원이 되기에는 굉장히 높은 허들을 가진 사람이 됐다.


그래서 17살 아빠의 이직이 결정되면서 진주로 가야 할 때는 참담함을 느끼는 수준이었다. 교복사에서 사은품으로 얹어준 신발 주머니라 생각했던게 학교 복장 규정에 포함되는 ‘지정 가방’이어서 교문 복장 단속에 걸렸을 때. 그러면서 순천에서 쓰던 책가방을 메고 등교한 나를 주변 사람들이 날라리로 본다는 걸 누가 선심써서 알려줬을 때. 순천에서 이미 다 배우고 온 김유정의 『봄봄』인데도 문학 선생님의 사투리때문에 어디를 읽고 있는건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벼락같이 ‘또’라는 글자가 나를 채웠다. 모든 것은 경험이고, 배움이라더니. 내가 다녔던 모든 학교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낡았던 그 교실에서 나는 모두에게 당연하지만 나에게는 처음인 순간들이 서글펐지만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적응했다. 나는 여전히 흐르는 사람이구나.


중국의 궁중 요리 중에 삼불점이라는 요리가 있다. 계란 노른자와 설탕, 전분, 기름 정도의 간단한 재료로 만들지만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술을 요해서 아무데서나 먹을 수 없는 고급 요리로 꼽힌다. 적당량의 재료를 적당한 약불의 팬에서 상태에 따라 조절해가며 약 400번 정도 쉬지 않고 휘젓는게 그 기술. 제대로 만든다면 접시에도, 젓가락에도, 치아에도 들러붙지 않아, 그 이름처럼 삼불점(三不粘)이 된다. 그리고 나는 어느 곳에도 고여있지 못하고, 쉼없이 휘저어진 이 요리가 나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타인에게도 들러붙지 않고, 어느 한 곳을 고향이라 정하지도 않은 채 유예하고 있으며, 어디든 흘러가는게 이상하지 않은 ‘삼불인’이라고. 어디서 왔냐는 질문은 여전히 답을 하기 어렵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하는걸까? 고민하면서도, 그럴 때 마다 접시에 훌륭하게 올라간 노랗고 동그란 삼불점을 떠올린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 요리가 다른 곳도 아닌 고급 요리 코너에 적혀있다는 걸 위안삼으며 혼자 웃는게 조금은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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