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롬 신드롬이 아니라

나만의 이유로 사랑하는 나만의 계절

by 동그라미

나는 겨울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왜냐면 나는 정말로 겨울의 그 감촉을 좋아하거든. 따뜻한 이불 속, 따뜻한 음료를 손에 쥐었을 때 얼어있던 손이 녹는 감촉, 눈가에 귓가에 닿는 크리스마스 분위기, 빨리 찾아오는 저녁과 혼자만의 시간, 차가운 공기가 만드는 묵직한 고요까지. 단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이렇게 추위에 고통받고 있을 때는 아니었음 하는 거다. 사실 이 건 겨울의 문제가 아니다. 겨울이 추운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이 많은 건물들을 시멘트로만 지었냔 말이다. 하, 건축학을 공부해볼걸. 상식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이 시멘트 건물의 냉기에 목을 더 움츠리며 발끝을 꼼지락거린다. 공공기관 내에서의 개인 난방 기구 사용이 금지됐기 때문에 무릎 담요 한 장에만 의지한 채 시멘트 냉기가 넘실거리는 발을 최대한 더 늦게 얼도록 꼼지락 거린다. 오리도 물에 빠져 죽지 않도록 수면 위에서 열심히 발장구를 친다지. 이렇게 죽을 순 없지.



"쌤 오늘 점심은 어떻게 하실래요?"



업무 스케줄 상 일주일에 두 번은 무조건 김밥을 먹는 생활이 벌써 1년째 지속되고 있다. 내가 들어오기 전은 한솥도시락이었다고 들었고, 내 입사에 맞춰 김밥 나라로 변경됐다가 한 여름에 김밥이 잔뜩 쉬어버리는 사고가 생겼었다. 그래서 잠시 또 컵밥으로 갈아탔는데 그 자극적인 요리에 다들 위장에 탈이 나면서, 결국은 다시 김밥 나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밥나라의 김밥을 김밥나라 사장님들보다 많이 먹었을 우리 팀 사람들이 점심 소리에 다들 반쯤 앓으며 의미 없이 메뉴판을 한 번 더 쳐다본다.

히터의 바람이 또 볼 부근을 스치고 간다. 메마른 피부는 아무리 미스트를 뿌려 올려도 효과가 없다. 끈쩍거리고 이상한 광만 번쩍일 뿐. 저녁에 시트팩을 붙여봐도, 오일이 듬뿍 들었다는, 엄마가 몰래 숨겨둔 크림을 발라봐도 똑같다. 그렇지만 이 것도 마찬가지로 겨울의 탓은 아니다. 겨울이 건조한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 공기는 바닥으로 가라앉는 걸 알면서도 천장 따위에 시스템 냉난방기를 달아서 뜨거운 공기를 얼굴 높이까지만 내뿜기로 작정한 현대문명이 나빴다.



"다녀오겠습니다"



전화로 미리 주문을 넣어놨다. 차키를 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내려간다. 딱딱해진 발끝이 어설프게 이상한 곳을 밟아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주머니 속 물건들이 다 잘 담겼는지 만지작 거린다. 추운 날씨는 외투 속에 있는 것들이 무사한 것에만 집중해도 바쁜 계절이다. 형태가 없는 바람이 칼날이라며 표현되는 계절이고,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계단도 조심해야 하는 계절. 꼭 웅크리고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뭔지 명확히 추리는 계절이다.

차에 타자마자 시트에서 전해지는 냉기와 얼음장 같은 핸들 때문에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면서 떨린다. 겨우 시동을 걸고 후진을 해서 주차장에서 차를 뺀다. 날이 추워진 캠퍼스에는 사람이 드물다. 쉬어가는 사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고, 모두가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사람이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A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는 중에 교차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속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이동하며 교차한다. 멈춰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제 뼈대가 모두 드러난 나무와 언제나 그 자리를 그렇게 지키고 있는 나무들이 이동하는 모든 것들 사이를 채우는 배경이 된다.



"싸인해놓고 갈게요"



이제는 너무 자주 봐서 서로 인사도 생략하고, 알아서 돈통 아래 깔린 장부도 찾아 꺼낸다. 질문없이도 알려주는 금액을 적어 잔액을 혼자 계산한 다음 싸인해 돈통에 올려둔다. 사장님은 보지도, 찾지도 않으신다. 나만 테이블에 놓인 비닐봉지를 들고 나선다. 자동문을 나서자마자 상가 숲을 헤치고 불어대는 골바람에 휘청하고 만다. 매주 정해진 요일마다 이곳을 드나드는 나도 누군가에게는 배경 같은 존재겠거니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나 추위가 나를 어서 차로, 사무실로 내몬다. 대부분의 잡생각마저도 바람에 날려가, 생존과 깊이 연관 있는 고민만이 남아있는. 어깨 위 외투는 무거워도, 머릿속은 캠퍼스처럼 비어버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겨울이다.



"식사 왔어요"



각자 자리에 주문한 메뉴를 나눠 가지고 돌아간다. 같이 시켰지만 같이 먹지는 않는다. 그럴만한 공간이 없거니와 다들 김밥나라로 어줍잖은 회식 분위기를 내기는 싫을 거다. 손을 씻기가 귀찮아 사무실에 비치된 공용 분무기로 손에 70% 정도로 제조된 소독용 알코올만 뿌려댄다.

그래. 여기는 내 볼이 메마르는 직장. 손바닥에 농도 70%의 알코올을 뿌리면서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이는 직장. 두 눈과 손이 정밀한 일을 하느라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는 나의 직장. 겨울이 아니어도 겨울 같은 곳이어서 편안한 나의 직장이다. 좋아하는 계절을 닮은 직장을 다니게 된건 나에겐 행운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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