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청부 살해 25만원'을 주문처럼 읊조리며 도망칠 때의 옵션
-추석 때 적은 글을 다시 편집해서 올립니다-
우리 집은 극도로 남아선호가 심한 쌍도 오브 쌍도의 장손인 우리 아빠와 극도로 가부장적인 외할아버지 밑에서 여남 차별이 더럽고 치사해서 최대한 빨리 독립하고자 하던 서울에서 미대 다니던 엄마가 만나 결혼한 케이스로 접점 하나 없을 인생에서 중매쟁이를 가운데 끼고 만나 만남이 성사됐고, 결혼까지 하게 된 케이스다.
서로가 너무 달라서 젊은 미혼남녀 시절에는 그게 매력으로 닿아 결혼에는 성공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서로 공유하며 살게 별로 없는 두 사람은 살면서 서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부분에서 가장인 아빠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학생 신분으로 지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치열하게 지지고 볶으며 사는 행색이었다. 어릴 때는 그 잦은 부부싸움과 폭력적인 상황들이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때의 그 투쟁 속에 싹튼 전우애가 두 분에게 남겨져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 때문에 이해를 못 하고, 이해를 못 받아서 지지고 볶는 와중에 제삼자가 나타나 또 이 싸움에 불을 붙인다. 아니 장작을 마구마구 늘어놓고는 화염병을 던진다.
자기는 만삭으로 밭일을 하다가 애를 낳았고, 애를 낳자마자 나가서 남은 밭을 마저 맸다고 주장하는 자, 아빠의 엄마다.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이 집안은 남아선호 사상이 기가 막히는데 우리 아빠는 위로 누나가 있음에도 장손이고 장남이기 때문에 집안의 대들보이자 기둥이고, 맏며느리로 들어온 우리 엄마는 집안의 대표적인 종이였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어른들에게 순종적인 게 옳고, 바른 줄 알고 컸던 우리 엄마에게는 끔찍하지만 익숙한 시집살이의 연속이었고, 아빠는 방관했다(왜냐면 아빠가 자란 세계에서는 그 게 문제 될 게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랑 내 동생이 태어나던 시기(나는 기억도 잘 없는 시기)에 이 부부는 시댁에서 치이고 돌아와(아니면 전화를 통해 말로 후드려 패진 후) 젊은 나이의 패기와 혈기로 오지게도 싸웠고, 내용은 아마 아무도 기억 못 하겠지만 싸우던 그 강렬하고도 폭력적인 장면들만 기억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어린 나이에도 눈치란 게 있어서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어서 쉬는 세탁기가 있는 욕실 하수구에 싸야 하고, 똥은 천년 묵은 것 같은 푸세식 화장실(등도 안 달려 있어서 기둥에 걸어 둔 플래시를 들고 가야 했다)이나 거름 묵히는 외양간에서 소의 눈치를 보며 싸야 했던 그 집에서 기원했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 내가 빠른 죽음을 바라는 인물은 우리 할머니다.
이 어른은 시골에서 쌀이나 밤, 곶감, 등을 만들어 파시면서 생계를 유지하시고, 한 편으로는 대단한 불자가 되셔서 자식들에게 받는 용돈의 십칠조 쯤은 다시 부처님에게 헌납하는 분이신데, 어찌나 그 불심이 대단한지 자기 시어머니가(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어머니가 되고, 나에게는 증조할머니가 되신다) 교회 쟁이라고 장손인 자기 남편과 사는 집에도 못 오게 하고, 할아버지가 자기 엄마 만나러 가는 것도 극도로 싫어하셨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는 집안의 장남인 게 우리 할아버지였지만 그분 조차도 자기 엄마 보고 살 생각을 못할 정도였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중학생 때까지 살아계셨는데, 건강하시긴 했지만 노환으로 인해 귀가 잘 안 들리셨다. 그래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증조할머니의 딸(나한테는 고모할머니)이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자식들 집을 돌면서 며칠씩 기거를 하는 '투어'를 한 번 하신 적이 있는데, 할머니는 그때도 이 교회 쟁이 모녀가 자기 집에 찾아와서 밥 먹고 잠자는 게 고까워서 방에 들어가 불경을 최대 볼륨으로 틀고(그래야 가는 귀가 먹은 할머니도 들을 테니까) 한 번을 내다보지도 않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항상 밥을 아주 조금 드시고, 우리 옆에 꼬부랑 허리로 앉아서 식사 후의 진한 다방 커피 한 잔을 즐기시면서 잘 들리지도 않는 귀로 우리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개미 할머니(허리가 많이 휘어서 증손자들끼리 개미 할머니/왕 할머니라고 불렀다. 예의도 없게)의 모습을 좋아했다.
증조할머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할아버지가 밤 밭에서 일하시다가 낙상 사고로 증조할머니보다 일찍 돌아가셔서, 증조할머니 상을 치를 때 장남인 할아버지는 이미 안 계셨고 막내아들이 상주를 져야 했다. 그런데 장남/장손에 꽂히다 못해 미쳐버린 우리 할머니가 쌩난리를 쳐서 잘 살아 있는 막내아들을 놔두고 손자인 우리 아빠가 상주를 지냈을 정도니, 교회 쟁이를 증오하는 마음과 남아선호 사상 사이에서도 남아선호 사상이 좀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게 우리 할머니의 심리였던 것 같다. 아니면 도저히 자기 눈앞에서 교회 쟁이 방식으로 초상 치르는 걸 못 보겠는 불심이 남아선호 사상과 기가 막히게 융합된 건지도 모르겠고.
이런 전설 아닌 레전드처럼 전해 내려오는 얘기 외에도, 딸만 줄줄이 낳던 우리 엄마에게 아들 낳을 생각 없으면(셋째 이후로 더 이상 애 안 낳기로 부부끼리 합의했다는 얘기를 전해드린 참이었음) 빨리 다른 여자랑 다시 결혼시키게 이혼하라던 일(심지어 그 말을 한 그 시점에 온 일가친척이 다 한 방에 모여있었다. 심지어 나도 있었음), 아빠가 아직 취직한 지 얼마 안 돼서 돈도 얼마 못 버는데 직장 잡고 잘 풀렸으니 동네에 잔치를 열어야 한다고 돈도 부치고 엄마도 들어와서 일을 하라던 일, 아빠가 잘 됐으니 부처님에게 감사를 표해야 한다며 삼백만원을 내놓으라고 한 일(아빠가 한 달에 300도 못 벌 때였다), 등. 진짜 지금 당장은 기억도 안나는 염병 천병 한 일들을 많이 한 사람이다.
아 그리고 지금 우리 집 막내로 있는 넷째(그렇다. 결국 넷째까지 갔다) > 남 <동생에게는 집안의 장손이라며 어찌나 물고 빨고 좋아하시는지, 이 어린놈의 새끼가 어릴 때부터 '그 건 누나들이나 하는 일이잖아!' 같은 말로 매를 벌고 정신 개조를 필사적으로 요청하는 순간에도 할머니는 둥가 둥가 난리도 아니었다. 중학생 때까지 자기 손톱(엄마가 잘라줌)이며 신발끈(아빠가 매 줌) 하나도 제대로 못 묶는 걸 사람이라고 같은 집에서 한 솥 밥 먹고 지냈다니 아직까지도 열불이 찬다. 그리고 그 거 제대로 교정하느라 k-장녀인 나도 집에서 독학으로 격투기 야매 1단쯤은 딴 것 같다.
당연히 이런 좆같은 일을 벌이는 집안 어른이 있으면, 말리는 사공이 삼천쯤 되지 않는 한, 집안에 화가 내린다. 근데 이 집안은 웃기는 집안이라서 온 집안사람들이 다 자기 엄마가 맞말 대잔치를 열고 있는 줄 아는 거다. 듣는 사람이 말속에 담긴 진의를 못 가리고 꼬아서 듣고, 오해하고, 곡해하고, 자기 엄마를 못된 년으로 만들고 있는 줄 아는데,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도 기가 찬다. 이게 무슨 트위터 공구에서 동인지 초회 한정 굿즈를 놓쳐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하는 1인 같은 말이람. 그래서 이 온갖 사공들이 또 전화로, 면전에서 엄마를 갈군다. 젊은 날의 전화 쌍욕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에 이르러서는 단톡방에서 사이버 불링을 해대며 듣는 '너 그렇게 행동해서 어디 너네 아들 잘 되나 보자'(이 상황에서도 남아선호 사상이 쩔어서 위로 줄줄이 딸린 나와 여동생들은 깡그리 건너뛰고 아직 군대 제대도 못한 아들 새끼 잘 되나 보자는 욕을 한다. 진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집안의 무궁무진함은 어디까지일까?)에 이르기까지 사공들이 노를 들어 우리 엄마를 다 같이 뚜까 패는 꼴이다.
그래서 우리 엄마 아빠는 아직까지도 할머니 때문에, 이 집안 말하는 꼬락서니 때문에 싸운다. 기력이 없어서 젊은 날의 깨부수는 패는 싸움은 이제 못 할지 몰라도, 이번에도 명절을 앞두고 크게 싸워서 가정법원을 오가는 추석을 보낼 뻔했다. (아 진심 이 맘 때쯤에는 자려고 누울 때마다 필리핀 청부 살해 25만원이면 해결할 수 있다는데 어떻게 나인걸 걸리지 않고 컨택할 수 있을까 뜬 눈으로 고민함)
자 그래서 진짜 본론이다. 나의 명절 이야기다. 필리핀 청부 살인을 꿈꾸는 30대 여성은 어떻게 명절을 보내는가. 지긋지긋한 제사며 명절 때 어떻게 도망치는가. 혹시나 나와 같은 상황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기록해둔다.
1. 템플 스테이
처음에는 할머니가 역정을 낼까 봐&아빠가 그 역정에 나를 혼낼까 봐 무서워서 할머니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절로 간다 그러면 좀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템플 스테이를 다녔다.
휴식형이 1박에 5만원이던 시절부터 다녔고, 자차 기준으로 집에서 1시간 내외로, 차가 밀리지 않고, 국도로 이동할 수 있는 익숙한 길로만 다녔는데, 보통의 루틴은 이랬다.
(1) 절이 있는 지역에 아침부터 출발해서 도착
(2)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관광과 포식을 겸함(보통 연휴 전에 인스타나 서치를 통해서 가볼 만한 스폿들을 미리 챙겨둔다)
(3) 배불리 먹었고 커피도 한 잔 때렸으면 이제 절에 입성
(4) 배정받은 방에서 제공해주는 절복으로 환복까지 했으면 더 이상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그래서 가져온 노트북으로 영화나 보거나 책을 산더미같이 쌓아두고 재밌는 부분만 휘리릭 넘겨보면서 보낸다.
(5) 내가 낸 돈에 포함된 저녁/아침 전부 다 스킵하고 차담이 있으면 차 정도는 마시러 가본다. 안 그러면 내가 나쁜 맘먹고 들어온 사람일까 봐 절에서도 걱정하는 것 같아서 되도록 한 번 정도는 얼굴을 내비치는 편이다. (참고로 도시 생활에 지쳐서 좀 조용하게 혼자 있고 싶어서 들어왔다고 하면 되도록 잘 안 건드리시려고 한다)
(6) 아침에 내 짐을 싹 챙겨서 차 트렁크에 하나씩 밀어 넣고, 집으로 가는데 혹시나 집에 친척들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 집 근처 카페에서 간단하게 브런치를 먹으며 엄마한테 몰래 전화 한 번 해서 체크한 뒤 귀가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도망치기 위해 다녔는데, 한 두 번 다니다 보니 스킬이 쌓여서 내 베개랑 담요, 개인 텀블러 정도는 챙겨 다니게 됐다. 침구는 내가 빠지자마자 바로 세탁하시겠지만 알게 모르게 베여 나오는 묵은 냄새가 적응하기 불편했고, 침대에서만 자던 허리가 바닥에서 자려니까 빠개질 것 같아서 제공되는 이불은 전부 바닥에 깔고, 내 담요를 덮고 자는 게 편했다.
이렇게 몇 번을 하다 보니까 연휴 기간 동안 싸고 편안하게 쉬다 갈 수 있어서 좋았는데, 돌발 상황이 터졌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템플 스테이가 전부 닫힌 거다.
2. 호캉스
그래서 뫄뫄 시에 살면서 뫄뫄 시에서 호캉스 하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집에는 템플 스테이를 간다고 뻥을 치고는 새벽부터 나와서(할머니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카페에 죽치고 앉아있다가, 체크인 시간이 가까워지면 배쓰밤이니 일용할 양식이니를 바리바리 사들고는 호텔로 가는 거다.
템플 스테이보다 최대 3만원 정도는 더 비싸지만 몸은 더 호강한다. 우리 집 보다 더 큰 욕조도 있고, 템플스테이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침대가 있다. 특히 내가 다 아는 동네에서 혼자 1박을 하는 거라 갑자기 뭐가 땡긴다거나 필요하면 바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게 매우 편하다.
그렇게 호텔에서 향기로운 물에 푹 삶아진 뒤 나 혼자만의 성인 돼지 파티를 즐기다가 체크아웃을 한 뒤에는 명절이라고 고향에 방문한 친구들을 잠깐 만나서 브런치 겸 커피 타임을 갖고 집으로 들어간다. 바로 집으로 가면 역시나 그 인간들을 마주칠까 봐 스케줄을 억지로 하나 더 집어넣는 거다. 호캉스야 뭐, 각자 취향 껏 즐기는 거니까 내가 공유할 루틴이랄 것도 없다.
3. 그리고 지금
위에서 말했듯이 가정법원을 오갈 뻔한 이번 싸움 덕분에 이번 추석부터는 명절 제사가 아예 사라졌다. 제사 핑계를 대고 우리 집에 와서 자기를 종 부리듯이 하는 너네 집안 인간들 개빡친다고 엄마가 일방적으로 결정해 통보한 사실이고, 아빠도 오케이 했다. 그래서 이번부터는 어디도 안 가고 집에서 한 번 버텨보려고 한다.
코로나 때문에 서로 왕래도 적어졌고, 사회적으로는 그 게 문제가 된다는 듯이 말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땡큐 하다. 이번에도 집에 방문하는 인간들이 있으면 내 손으로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는데(딴 말이지만, 난 우리 아파트의 장애인 주차 구역에 자꾸 주차하는 캠핑카를 매일같이 신고해서 다른 자리로 이동시킨 전적이 있는 열혈 신고러다) 자기들 오지 말라고 제사까지 없앴으니 오는 인간은 없겠지.(라고 일단 믿어본다.)
앞으로 살면서 몇 가지 변동은 더 있겠지만 일단 내 명절은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날씨가 조금 더 따뜻한 추석에는 절 근처의 처음 가보는 골목이며 길거리를 뽈뽈 거리면서 텅 빈 관광지를 돌았고, 설에는 대부분의 절이 산에 위치한 터라 근방을 돌다가 얼어 죽을까 봐 배정받은 방에 처박혀 보일러를 빵빵하게 올리고 책이나 영화를 독파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내가 사는 지역의 비즈니스 호텔들을 전전했고. 이번 추석부터는 집에서 지내지만 아마 이 것도 몇 년 안 가서 변동되지 싶다. 내가 독립을 한다거나 할머니나 사공 중 하나가 또 지랄을 떨면 내가 튕겨져 나가던가. 그래도 올해만큼은 좀 별 일 없이 지나갈 것 같아서 한시적으로 마음은 평안한 한가위다.
이 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행복하고 건강한 명절 보내시길.
그리고 이 글을 읽으면서 설마 내가 사공인가? 싶은 분들은 앞으로 입 다물고 자기 앞길이나 잘 가리시길 바라고, 내 사정에 공감하시는 분들에게는 계속 존버하자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어차피 저 인간들보다는 우리가 더 오래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이 더 오래 살아 남아 승리합시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