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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이공키로미터 Jul 18. 2022

내가 사랑하는 공간들 - 한국영상자료원

아주 가끔 오롯이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운 좋은 날이 선물처럼 찾아온다. 아내가 친정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거나 아내가 친구들과 함께 1박 2일 여행을 가는 그런 날 말이다. 이런 날은 정말 소중하고 알차게 보내야 한다. 뭘 하지.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 할까. 홍대 메타복스에 가서 LP판을 살까. 만화방에 가서 라면 먹으며 만화책을 볼까. 


홀로 보내는 시간, 가장 많이 간 곳은 바로 상암동에 자리 잡은 한국영상자료원이다.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그곳에 가면 훌륭한 영화를 커다란 스크린으로 무료로 볼 수 있는 데다, 작지만 편안한 도서관에서 책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참 자주 갈 때는 일주일에 몇 번씩 가기도 했는데, 코로나를 겪으며 뜸하게 갔던 것 같다. 영상자료원에서는 주기적으로 테마를 정해 기획전을 여는데 대중성보다는 영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품 위주로 채워진다. 기획전이 없을 때는 프로그래머들이 엄선한 영화를 상영하는데, 그들이 선정한 영화들은 어찌나 다 주옥같은지 이곳을 십수 년간 다녔지만 실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영상자료원을 갈 때는 보통 영화를 사전에 알아본 다음 예매하는 게 아니라, 무작정 극장에 가서 시간대가 맞는 영화를 보는 편인데, 그곳에서 예기치 않게 보게 된 몇몇의 영화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윤정희 배우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던 김수용 감독의 야행,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 깜짝 놀란 니콜라스 뢰그의 돈 룩 나우, 영상자료원에서 거의 드물게 자리가 만석이었던 코폴라 감독의 대부 1편, 장만옥이 아니라 장학우를 선택한 바보 같지만 멋진 유덕화가 나오는 열혈남아, 다이안 키튼의 매력적인 노래를 조용히 지켜보던 우디 앨런이 나오던 애니홀. 과거에 본 영화들도 있고, 새롭게 보게 된 영화도 있었지만 왠지 이곳에서 본 영화는 더 감동스럽고 영화가 주는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곳에 찾아오는 관객들의 영향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기 위해 서울의 가장 가장자리에 위치해있고, 지하철역에 내려 또다시 버스를 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이곳에 수고스럽게 오는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아우라가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하는 것 같다.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극장 좌석에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예전 혜화동 근방 시네마떼크에서 느꼈던 그런 시네필들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감지할 수 있고, 그들과의 관람은 나를 더욱더 영화 속에 들어가게 만든다. 

이 글을 쓰는 오늘(7/17) 한국영상자료원 상영작은 이마무라 쇼웨이의 "복수는 나의 것", 장철의 "대자객, 왕우"이다. 아, 아내에게 무슨 핑계를 내서라도 꼭 가서 보고 싶은 셀렉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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