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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이공키로미터 Oct 17. 2022

내가 사랑하는 공간들 - 마포평생학습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지금은 토요일 2시를 막 지난 시간이고, 이곳은 홍대 전철역에서 가까운 마포평생학습관 연속간행물실이다. 밖에서는 누가 버스킹을 하는지 잔잔한 노랫소리가 들리고, 열람실안에서는 사각사각 신문 넘기는 소리와 내 노트북 키보드 소리가 어우러져 아주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살면서 의무가 아닌 자의로 가장 많이 방문한 장소를 꼽는다면 바로 이곳이 될 것이다. 대학 때 처음 이곳을 알게 되었으니 20년을 훌쩍 넘도록 이곳에 신세를 졌다. 아현동에 있던 마포도서관이 가스 폭발로 사라지고, 이곳 홍대에 도서관이 들어선 것은 95년이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여러 용도로 이 도서관을 들락날락했다. 소개팅을 하기 전 혹은 친구를 만나기 전 남는 시간을 메우기 위해 오기도 하고, 싼값으로 한 끼 때우기 위해 도서관 구내식당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 당시 홍대는 놀거리가 워낙 많았고, 나도 조용히 책을 보기보다는 바깥세상에 더 관심이 많을 때여서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는 않은 것 같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다. 2000년 초반 홍대는 그 전보다 훨씬 더 커지고 화려해졌다. 골목마다 사람들이 넘쳐났고, 지하철역 근처에 있던 도서관 주변은 자욱한 담배연기와 인파로 늘 복잡했다. 인파를 피해 들어간 도서관은 마치 다른 세계 같았고, 책과 잡지는 나를 조금은 진정시켜 주었다. 일과 사람에 지칠 때에도 이곳에 왔다. 도서관은 언제나 조용히 나를 반겨주었고, 외롭고 지친 나를 보듬어 주었다.(단, 매월, 둘째 넷째 월요일, 법정공휴일은 예외였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여자 친구도 약속도 없던 어느 주말, 궁상맞게 홍대 거리를 홀로 한참 동안 헤매다가 도서관에 들려 눈이 시큰해지도록 책을 보고 기운을 되찾은 기억이 난다.


결혼을 하고, 공교롭게도 도서관 근처 동네에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집 가까운 곳에 이곳보다 더 크고, 시설도 좋은 마포중앙도서관이 있었지만, 난 주말이 되면 아내와 혹은 아이들과 더 멀고 오래된 이 도서관을 찾았다. 유아열람실에서 그림책을 읽어주어야 했던 아이들은 쑥쑥 자라기 시작했고, 어느새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책을 찾아 읽고, 나는 그 곁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주말 오후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읽다가 출출해지면 근처 분식집에 갔고, 난 아이들이 떡볶이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다시 책을 보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뿐만 아니라, 수년간 독서모임을 이곳에서 하기도 했고, 직장 다니면서 유학 준비를 위해 몇 달 동안 퇴근 후 이곳에 와 정말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소설을 쓴답시고, 주말에 나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안 써지는 글을 쓰기도 했고, 아내와 부부싸움을 크게 하고 집 나와서 갈 때가 없으면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서가에 대충 어떤 책이 있는지, 자주 오는 사람들이 누군지, 도서관 근처에 어떤 맛집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곳에 오게 될지, 얼마나 많은 추억이 더 쌓일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장소보다 더 자주 올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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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장점만이 있는 건 아니다. 구내식당 밥맛은 이유를 모르겠지만, 수년째 변함없이 별로이고, 정기간행물 실 서가 간격이 너무 좁아 잡지를 찾기가 불편하다. 주말에 문을 일찍 닫는 것도 좀 그렇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이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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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를 comfort zone 이라 하는데 도서관은 적지 않은 이에게 컴포트존일 것이다.  간서와 레거시 미디어를 즐기는 장소로, 정독과 통념의 공간으로도 좋겠지만 ‘추억이 쌓인 곳’ 은 역시 뭔가 쫌 더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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