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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fort food - 호박김치

by 삼이공키로미터


선배가 지금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글을 써보자고 제안했다. 책상 앞에 앉아 지금 동남아 어디선가에서 뻘짓거리하고 있을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노트북을 꽝하고 닫았다. 분노와 짜증이 밀려와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맘을 진정시키며 냉장고를 열어보니 며칠 전 아버지가 보내준 호박김치가 눈에 들어왔다. 호박김치는 내 고향 합덕 근방에서만 담가 먹던 김치인데,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 아버지가 매년 보내주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한동안 먹지 못했는데, 몇 년 전부터 신평사는 큰고모와 아버지가 날이 추워질 때쯤 이 김치를 함께 만들고 계신다.


호박김치는 반드시 푹 끓여 찌개로 먹어야 한다. 아버지 표현을 빌리면, 멸치 몇 마리 넣고, 푹 지져서 먹어야 한다. 그냥 먹으면 늙은 호박의 달고 부드러운 맛을 느낄 수 없다. 멸치로 육수를 낸 뒤 호박김치를 넣어 적당 시간 끓여준다. 다른 재료를 넣을 필요 없고, 들기름이 있다면 넣어주면 좋다. 잘 익은 호박은 달큰하면서 매콤하고 부드럽다. 슥슥 밥에 비벼 먹으면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울 수 있다.


어릴 적 어느 겨울날, 코가 빨개지고, 손이 틀 정도로 밖을 쏘다니다가 해가 떨어져 집에 들어서면 매콤하고, 구수한 냄새가 났다. 밥상 위에 커다란 냄비에 호박김치찌개가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고, 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삼촌과 머리를 맞대고 정말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아들이 허겁지겁 밥 먹는 모습을 보던 어머니의 눈빛과 서울 사는 아들 주려고 김치통을 가지고 올라오시던 아버지의 눈빛이 왠지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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