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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이공키로미터 Nov 13. 2022

Comfort food - 호박김치


선배가 지금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글을 써보자고 제안했다. 책상 앞에 앉아 지금 동남아 어디선가에서 뻘짓거리하고 있을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노트북을 꽝하고 닫았다. 분노와 짜증이 밀려와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맘을 진정시키며 냉장고를 열어보니 며칠 전 아버지가 보내준 호박김치가 눈에 들어왔다. 호박김치는 내 고향 합덕 근방에서만 담가 먹던 김치인데,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 아버지가 매년 보내주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한동안 먹지 못했는데, 몇 년 전부터 신평사는 큰고모와 아버지가 날이 추워질 때쯤 이 김치를 함께 만들고 계신다.


호박김치는 반드시 푹 끓여 찌개로 먹어야 한다. 아버지 표현을 빌리면, 멸치 몇 마리 넣고, 푹 지져서 먹어야 한다. 그냥 먹으면 늙은 호박의 달고 부드러운 맛을 느낄 수 없다. 멸치로 육수를 낸 뒤 호박김치를 넣어 적당 시간 끓여준다. 다른 재료를 넣을 필요 없고, 들기름이 있다면 넣어주면 좋다. 잘 익은 호박은 달큰하면서 매콤하고 부드럽다. 슥슥 밥에 비벼 먹으면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울 수 있다.


어릴 적 어느 겨울날, 코가 빨개지고, 손이 틀 정도로 밖을 쏘다니다가 해가 떨어져 집에 들어서면 매콤하고, 구수한 냄새가 났다. 밥상 위에 커다란 냄비에 호박김치찌개가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고, 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삼촌과 머리를 맞대고 정말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아들이 허겁지겁 밥 먹는 모습을 보던 어머니의 눈빛과 서울 사는 아들 주려고 김치통을 가지고 올라오시던 아버지의 눈빛이 왠지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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