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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이공키로미터 Dec 03. 2022

후암동에서

어느 추운 날, 친구와 후암시장 한구석에서 고기를 구워 먹다가 이번 주는 무슨 주제로 글을 쓸까 고민하던 찰나, 친구 녀석이 후암동! 하길래. 바로 결정했다. 그래, 이번 주는 후암동이다.


후암동을 처음 오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다. 당시 서울역 건너편, 후암동 들어가는 길목에 대일학원이란 큰 규모의 단과 학원이 있었는데, 이곳에 유명한 선생님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몇 달 동안 이 학원을 다녔었다. 커다란 공간 안에 다닥다닥 붙은 좁은 책상에 앉아있는 수백 명의 학생이 만들어내는 열기가 늘 강의실에 가득 찼고, 학원이 마칠 때 즈음이면 후암시장 가는 길이 꽉 차곤 했다. 그 길에 분식점, 오락실, 만화방이 즐비했고, 난 2개 들을 강의를 하나만 신청하고, 남은 돈을 그 길에서 탕진했다. 그때 먹던 분식점 라면은 어찌나 맛있고, 오락실의 게임은 얼마나 재미있던지. 남산까지 이어지는 그 길은 카오산로드이자 홍대 주차장길이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에 가고, 연애란 걸 하게 됐다. 당시 용돈은 변변찮고, 어디를 데려가야 여자가 좋아하는지도 잘 모를 때, 난 여자 친구와 남산타워에 갔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여자 친구 사정을 생각지도 못하고,  남대문시장에서 후담동을 거쳐 남산도서관 쪽으로 해서 남산타워에 갔다. 타워 꼭대기에 천천히 빙빙 도는 커피숍이 있었고, 그곳에서 커피에 각설탕을 넣어 훌훌 마셨다. 그때 그 쌉쌀한 커피맛은 기억이 나는데, 내 앞에 여자 친구가 누군였는지는 기억이 잘 생각이 안 난다. 일본 교토의 살사바에서 만났던 토모미였나, UBF에서 나를 가르쳐주던 숙대 다니던 자매님이었는지, 글솜씨가 좋았던 고등학교 여자 동창이었나, 내 앞에 그녀의 얼굴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계는 어김없이 핑글핑글 돌고, 지금 이 글을 함께 쓰는 선배가 숙대 앞에서 후암동으로 이사를 갔다. 서울역에서 내려 헉헉거리며 언덕을 올라간 다음,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4층까지 더 올라가야 하는 후암동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선배의 집은 기가 막힌 뷰와 큼직한 옥상을 가지고 있었다. 집들이 때 본 그 매력적인 옥상을 눈여겨본 나는 어느 날 친구들에게 엉성한 포스터를 만들어 메일로 보냈다. 지금 내 앞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 친구 녀석은 커다란 스피커를 가져오고, 선배는 데스크탑을 옥상으로 옮기고, 빔프로젝트를 옥상 구석에 설치한 뒤 우리는 빌머레이가 나오는 “사랑의 블랙홀"을 봤다. 

친구 녀석과 고심해 고른 영화는 유쾌했고, 좋은 사람들과 술과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보낸 그날 밤은 정말 행복했다.  


어떤 인연인지, 난 올해부터 서울역 근처 후암동에서 근무하고 있다. 매일 아침 서울역에서 내려 튼튼해 보이는 대우빌딩을 지나, 출근하는 직장인 무리에 섞여 사무실로 향한다. 횡단보도에서 잠시 신호를 기다리는데, 멀지 않은 곳에 남산타워가 보인다. 지금은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 길을 좀 더 올라가면 후암맨션이 보일지 모른다. 문득 골목길을 보는데, 가방을 멘 학생들이 종종거리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옥상 영화제는 한껏 들뜬 기분, 만취한 럭키와 허락도 없이(!) 내 데스크탑을 옥상으로 뜯어온 만행 등으로 기억되는데, 마침 형이 잠깐 왔다가 우리 노는 모습에 무척이나 부러운 눈길을 던졌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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