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퇴사와 가족

by 한톨

우리 집 식탁은 무거운 유리가 한 겹 깔려 있어서 그 아래에 사진이나 그만한 크기의 무언가를 집어넣을 수 있다. 퇴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 명함이 그곳에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가 아버지가 식사하는 자리에 있었다. 퇴사하고 나서 이틀쯤 후에 명함은 사라졌다. 집안일은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는 아버지인데 구태여 빼내기 어려운 명함을 손수 빼내셨다. 그것을 멀찍이 바라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믿음을 주는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나를 오랫동안 봐온 사람은 그렇다. 설령 그것이 합당한 생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옳지 않다고 따져 물을 생각은 없다. 그동안 내가 저지른 여러 실수나 잘못 따위는 내가 믿지 못할 만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다.

나도 정말 힘들었고, 그래서 나만 챙겼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그만큼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앞만 보고 빠르게 내달리던 시절도 서서히 저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빨간 망토를 본 황소처럼 나아갈 땐 보지 못했던 어머니, 아버지는 어느덧 늙은 나무를 떠올리게 할 만큼 나이가 드셨다. 날마다 보는 얼굴이라 깨닫지 못했을 뿐, 부모님은 시간이 주는 무게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계셨다.

믿음직스러운 자식으로 자라지 못해서 안타깝다. 솔직히 죄송하진 않다. 나 또한 부모님을 잘 믿지 못하니까. 덮어놓고 믿는 것을 나는 하지 못한다. 조금 병적으로 그러하다. 내가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면 믿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나를 잘 믿지 못했다.

조금 더 어릴 때는 남자아이다운 호승심으로 세상을 얕잡아봤다.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했고, 내가 한다면 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 특히 사회는 “넌 그것밖에 안 되는 아이야!”라고 내게 소리쳤다.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그게 현실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부터 나는 무작정 달리기를 그만뒀다. 생각하고 나서 움직이기로 했다.


멈췄다. 그동안 살던 방식을 버렸다. 그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그로부터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어 기쁘다. 내가 그토록 생각 없이 살았으나 여전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특히 부모님이나 가족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돼서 기쁘다. 그들에게 언제나 감사하다.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았을 뿐.

물론 아쉬운 적도 많다. 결코 용서하지 못할 일도 있을 테다. 다만 내 맘에 쏙 드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누구나 내가 싫어할 만한 부분이 있기에 그렇게만 생각하면 누구도 좋아할 수 없다.

부모님이나 가족을 억지로 좋아하려고 하진 않겠다. 그러나 억지로 멀어지려고 하지도 않겠다. 내가 바라는 건 부디 내가 믿음직스러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지울 순 없다. 그들이 내게 건넨 믿음을 뿌리치고, 내 맘대로 벌인 일들은 수십 년이 지나서도 나를 깎아내릴 때 쓸 만한 이야깃거리로 남아있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바뀌기를 그만두면 안 된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거라지만, 인간은 혼자 살기엔 너무 연약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적어도 잃지 않도록, 그만한 믿음을 주며 살아가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게 내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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