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습작

바코드 -1

22년 3월에 쓴

by 한톨

‘부품이 될 바에야 죽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친구가 유서를 보내왔다. 그 친구답게 어지러운 글씨였다. 글씨에 비해 내용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자신이 하고픈 말을 논리정연하게 늘어놓았고 유서에 언급되지 않으면 섭섭해할 만한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녀석과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은 나를 제외하곤 단 한 명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것 때문에 어쩌면 이 모든 게 장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서를 읽고 나서부터 지독한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턱을 덜덜 떨었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모든 게 진짜이고 내가 그 녀석의 유언 집행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에게 전화를 걸진 않았다. 언젠가 어떤 수학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난파선에서 축제를 벌일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내가 어떻게 될 걱정은 없었으나 나로 인해 다른 존재가 영영 어둠으로 치닫거나 아니면 조그마한 불씨를 되살릴 것인가, 그런 아주아주 중요한 문제에 발을 들여놓고 있으면서도 정작 나는 안전한, 그런 상황을 알게 모르게 즐겼던 것 같다.

이튿날 자정이 넘어서야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전화를 받았다.

“며칠간 잠을 못 잤어.” 내가 말했다. “며칠?”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 물었고, “이틀.” 내가 답했다. 그러자 녀석이 말했다. “친구, 나는 정확히 아흐레 넘어 다섯 시간째 잠을 제대로 자고 있지 못해. 얼마나 괴로운지 몰라.” 내가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녀석이 곧장 말을 이었다. “만약에 내가 정확히 아흐레 넘어 세 시간 전에 덴달리안을 만나지 못했으면, 그 유서는, 어쩌면 법적인 가치가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취했어?” 대뜸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이상한걸.”

녀석은 답을 하는 대신 헛기침을 두어 차례 했다. “아니, 아주 멀쩡해.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야. 덴달리안을 만난 날 밤 이후로 줄곧 가수면 상태에 있었어. 그러니까 렘수면 전 단계지. 그게 맞나? 그러니까……” “상표 없는 담배를 피운 건 아니고?” 녀석이 웃었다. 끅끅 거리는 소리 끝에 어딘지 모르게 싱그러운 기쁨이 서려있었다. “괜찮은 표현이었어. 그러니까 대마초를 피운 게 아니냐는 말이지. 그럴 리가! 내가 그랬다면, 나와 같은 핏줄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세상에서 없애려고 들 거야. 그저 가문이라는 기계의 부품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유일한 인간인 나를 없애려고 들겠지.”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친구. 기계와 인간이 싸우는 이야기는 공상 과학 소설이나 영화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야. 우리는 이미 그러고 있어. 그러나 그들은 전기로 움직이지 않아. 그리고 이상한 기계음을 내거나 어설프게 인간을 따라하지 않지. 그들은 인간이고 동시에 사회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부품이기도 하지. 누누이 말하지만……”

“난 절대 부품이 되지 않겠다?” 내가 말을 가로챘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 녀석은 답하지 않았다. 내가 계속 말했다. “그나저나 덴달리안을 만났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었어?” 녀석이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엔 끅끅 거리는 수준이었으나 웃음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누가 들어도 과장되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만큼, 녀석은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친구, 넌 내가 그 상표 없는 담배를 정말 피운다고 생각했나 봐? 너와 함께 있을 때 내가 그런다고 생각했나 봐? 아니야, 난 아주 멀쩡해. 나는 실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그런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한다고.” 녀석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덴달리안은 실존해. 실존하는 사람이야. 가능하다면 너와 인사를 나누게 하고 싶어. 너도 분명 그 아이를 좋아할거야. 그렇다고 너무 좋아하진 말아줘. 한 여자를 좋아하는 건 한 남자면 충분하니까. 저번에 내가 말했잖아. ‘0이 1이 되는 건 축복이지만 1이 2가 되는 건 재앙’이라고. 이진수에서 2는 없어. 컴퓨터는 2 같은 건 몰라. 녀석들은 바보야. 0 아니면 1밖에 모르지. 그런데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밖에 몰라. 정작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에 있는데 말이야.” 녀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전보다 작지만 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디 사람들이 나를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해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살아온 십팔 년의 세월만큼, 나를 존중해주었으면 좋겠고, 내가 누군가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 그 자체로 존중받았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것이야. 다른 건 바라지 않아. 그리고 항상 기억해!” 별안간 녀석이 목소리를 드높였다. “난 절대 부품이 되지 않아. 이 망할 사회의 부품이 되지 않겠어.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이 되겠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명문 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하면 될까? 아니, 난 이제 모르겠어. 망할, 망할……” 이윽고 ‘쿵’하는 소리가 났고 주변이 무덤처럼 조용해졌다. 나도 녀석도 그대로 잠이 든 게 분명했다.

녀석과 나의 만남은 다소간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도서실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던 내게 과민성 대장염을 앓고 있다고 소문난 사서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선생님은 개미도 듣지 못하고 지나갈 만큼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학생. 학생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는 게 하나 있는데……” 사서 선생님은 께름칙한 부탁을 할 때 항상 ‘학생’이라고 불렀다. 주름지고 노르칙칙한 얼굴과 어울리는 면이 하나도 없는 진초록색 안경을 한 번 고쳐쓰고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어떤 학생에게 말 좀 전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서 선생님이 중간고사를 막 끝낸 학생에게 부탁하기가 어려워서 그랬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은 그저 어려운 일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사서 선생님은 언제나 그랬듯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보기에,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것을 몹시 즐겼으나 그만큼 무시받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다. 그런 모습이 우리 반 반장 같았다. 그저 바르게만 자란 화초. “여기 있네. 이 학생이야.” 선생님이 화면을 가리켰다. 조글조글한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이 학생에게 가서 책을 좀 그만 잃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게. 그럴 수 없다면 책을 직접 구매해서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라고 귀띔해 주어도 좋고.” 선생님은 소리 없이 손가락을 거두고 손을 무릎에 얹어 놓고는 의자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부탁 좀 하겠네. 다른 학생들은 지금 이곳에 없어서.” 선생님은 자기 주장을 확인시키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돌려 텅빈 도서실을 멀찍이 내다보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도서실에 남아있을 고등학생이 얼마나 있을까. 그나저나 그 학생은 내가 알기로는 오래전부터 그래왔는데, 왜, 하필, 지금, 나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까. 아무래도 선생님은 내가 도서 위원회 학생들과 고립된 학생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더해 내가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던 게 아닐까. 그러므로 내게 부탁을 하면, 부탁을 했다는 사실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이고, 선생님이 그 학생을 아니꼽게 생각한다는 사실 또한 누구도 알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니 선생님이 조금 미웠다. 내가 이용 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부탁을 거절할 순 없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탓인지는 몰라도 마음이 어수선했고, 화면에 나온 그 학생이 꽤나 잘생겼다고 생각했기에, 그 학생을 만나는 일이 책을 읽는 일보다 더 재밌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다. 그래서 곧장 그 학생을 찾으러 갔다. 문제는 그 학생이 나보다 상급생이라는 점이었다. 외동으로 태어나 쓸쓸하게 자란 나에게 한 살 차이는 열 살 차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사교성이 좋지 못한 탓에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나보다 겨우 한두 살 많은 형이나 누나에게도 말을 놓았던 적이 없었고, 그랬던 탓에 나보다 한 살만 많아도 상대방을 대하는 게 몹시 어려웠다. 그렇다는 생각이 들자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2학년 건물에 들어섰고, 가방은 도서실에 놓고 온 터라, 이대로 돌아간다면 사서 선생님과 마주칠 테고, 그렇게 된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낱낱이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만약 그 학생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면 사서 선생님은 실망할 테고, 그렇지만 다른 학생에게 그 일을 시키진 않을 테니까, 결국 이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 또한 사서 선생님이나 우리 반 반장처럼 올바르고 착한 아이로 자랐던 탓에, 그런 불편한 상황에 맞서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찍히느니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상급생에게 찍히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여 곧장 그 학생이 있는 교실로 갔다.

복도는 고요했다. 생각해보니 중간고사가 막 끝난 터라 교실에 누군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발걸음을 돌리긴 아까웠기에, 카이사르가 그러했듯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속으로 외치며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교실은 조용했다. 정오가 갓 지난 교실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때문에 먼지가 두둥실 떠다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작은 스모그가 내리앉은 곳, 낡은 녹색 커튼도 숨죽여 있는 교실, 죽음보다 무책임한 고요 속에서 나는 그 녀석을 처음으로 만났다. 교탁에서 가장 먼 책상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 학생은 내가 칠판을 손가락으로 두들기기 전까지 내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칠판 반대편에 앉아있는 학생이 나를 바라보자, 나는 흠칫 놀랐다. 내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자 학생이 말했다. “나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옛날 강을 건넜던 위대한 장군처럼 용기내어 학생에게 다가갔다. “도서실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도서 위원회 학생이고요……” 그러자 녀석이 비웃듯 씨익 웃었고, 난 녀석과 눈을 마주했다. 왜 선생님이 녀석을 아니꼽게 여겼는지 그때 확실히 알았다. 누가 보아도 잘난 얼굴, 그리고 결코 길들지 않을 그 눈, 이 녀석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만약에 강을 건넜던 그 장군이 온다고 해도 녀석은 지금처럼 행동했을 게 분명하다. 녀석은 결코 누군가에게 길들지 않을, 그런 유형이었다. 나는 단번에 그걸 알아차렸다.

머릿속에 언젠가 녀석과 사서 선생님이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 스치듯 지나갔다. 쩔쩔매는 선생님과, 그와 반대로 승전보를 가지고 온 장군처럼 기세등등한 태도로 선생님에게 말하는 녀석의 모습이. 분명 그날도 책을 잃어버렸다며 대신 돈을 내겠다고 했을 것이다. 이전에도 수 차례 그랬듯이.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녀석이 대뜸 물었다. 오월에 따스한 햇살 덕분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그래서 녀석이 다짜고짜 반말했다는 것에 기분이 나빴다. 그럼에도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 “저는 도서실 학생회 위원이고……” 녀석은 다짜고짜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아.” 녀석이 검지를 빙빙 돌리며 미소를 머금고 나를 보았다. 그건 분명 조소였다. “너, 친구 없지?” 흠칫 놀라 굽어있던 어깨가 순간 쫙 펴졌다. 녀석은 웃지도, 웃지 않는 것도 아닌 표정이었다. “넌 누구야? 왜 온 거지? 아! 이런 질문은 한번에 하나씩 하는 게 좋은데. 그래야 머리 나쁜 사람들이 제대로 답할 수 있을 테니……” “나 머리 안 나쁘거든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자 녀석이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럼 네가 누군지 설명해 봐. 도서관 위원이니 뭐니 하고 지껄이면 너를 창밖으로 던져주겠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녀석은 그것이 마치 자기가 갖고 있는 호기심의 척도인 듯, 개의 꼬리처럼 검지를 흔들어댔다. “나는, 아니 저는……” 겨우 입을 뗐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만약에 내가 사서 선생님처럼 과민성 대장염이 있었다면 뱃속에서 콘서트가 열렸을지도 모르겠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내가 몇 학년이고 이름이 무엇인지 말했다. “그런 건 관심 없어. 넌 고작 고등학생이야?” 순간 어이가 없어서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고 되묻자 녀석이 웃었다. “흔해 빠졌네. 그냥 부품이네, 부품.” 녀석은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화가 나서 책상을 내리치며 따지자 녀석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너, 한번이라도 그렇게 책상을 강하게 친 적 있어?” 난 고개를 저었다. 알게 모르게 녀석에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순간 역겨웠다. “그게 네 진짜 모습이 아닐까. 내가 보기에 너는 나랑 닮은 구석이 있어. 그걸 감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지. 만약에 네가 남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면 넌 분명 나처럼 살 거야.” 내가 답이 없자 녀석이 너털웃음을 쳤다. “정말이라고! 진짜라니까. 너랑 나는 같아. 아마 넌 내가 엄청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생각은 달라. 만약에 다른 인간들도 나처럼 개성을 거세하지 않고 산다면, 나보다 더한 인간도 수두룩할걸? 난 확신해. 그렇지만 모두들 등굣길의 가로수처럼 깔끔히 다듬어진 채로 살잖아. 개성 같은 건 거세시키고 말이야. 그런데 넌 아직 거세가 덜 됐네. 그렇다는 말은 네 개성은 누군가 꺾지 못할 만큼 강하단 말이야. 다르게 말하자면, 너에겐 너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아직은 남아있다는 말이지.”

“저는 지금도 저로 살고 있어요.” 내가 답했다. 별안간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어 눈이 부셨다. 녀석은 창문을 열어젖혔다. 바람이 불었고 그제야 내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한테 존댓말 하지 마. 나를 존대하지 말라고. 사실은 나를 멀리하고 싶을 뿐이잖아. 다들 그래서 존댓말을 쓰지. 적어도 난 그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겐 반말을 쓰지. 그게 내 방식이야. 내가 십팔 년간 살아오며 정한 하나의 규칙 중 하나지.”

“정말로 그래도 되나요?” 내가 되묻자 녀석이 답했다. “그럼, 얼마든지!” 녀석은 내가 찬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시간이 없군!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너는 지금의 네가 좋아? 그 모습 그대로 평생 살고 싶어? 이런, 또 두 가지를 물어보았네!” 녀석이 거만하게 손짓했다. “첫 번째 것만 대답해. 그거면 충분해.”

불어오는 바람에 마주선 채 얼마간 멍하니 서있었다. 운동장 어디선가 환호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시험이 끝난 학생들이 작은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고, 내가 아닌 사람들은 언제나 끼리끼리 모여 잘만 놀러다녔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다는 생각이 들자 질문에 확실히 답할 수 있었다. 내가 녀석에게 뭐라고 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녀석은 만족한 듯 그때껏 보지 못한 환한 미소를 띠며 내게 손을 건넸다.

“네가 누구든지 난 관심 없어. 네 이름이 뭐고 몇 학년이고 여자친구는 몇 번 사귀어봤고,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난 네가 마음에 들었어. 너라는 놈이.” 녀석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게 한 가지 좋은 말을 해줄게. 너 자신을 드러내. 넌 특별한 사람이야. 흔해 빠진 부품이 될 인물이 아니지. 내가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의 답을 알려 줄 테니 잘 들어. 부품이 아닌,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건, ‘나’로 사는 것이야.” 녀석은 검지로 인중을 긁느라 잠시 말을 멈췄다. “쉽게 말해서, 너는 꽤나 축복 받은 아이야. 멍청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있으니까. 비록 지금은 고독할지라도, 지금은 내가 헛소리하는 것처럼 들릴지라도, 머지않아 내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반말해도 된다고 했죠?” 눈을 반짝이고 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 개소리야?” 내가 소리쳤다. 그러자 녀석이 소리 내어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건넸다. 그것을 얼떨떨하게 쳐다보자, 자기 손바닥 위에 내 손바닥을 맞대라고 했다. 자기만의 인사법이라고 했다. 진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하는 인사법이자 자기가 십팔 년간 살아오며 만든 인생의 규칙 중 하나라고 힘주어 말했다. 인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녀석의 손바닥을 들여다 보았다. 녀석은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손바닥을 빼지 않았다.

“손바닥에 웬 바코드를 그려놓았어?” 그러자 녀석이 나를 노려보았다. “바코드라고?” 녀석이 되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바코드라니! 하하하!” 녀석은 교실이 떠나가라 소리 내어 웃어댔다. “나한테 바코드가 있었다니! 바코드라고! 내게 바코드가?”

녀석은 그것이 바코드가 아니라 덴달리안이 그려준 그림이라고 말했다. 더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주겠다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교실에 남겨진 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운동장은 학생들로 가득 했고 쉴 새 없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간 멍하니 서있었는데, 누군가 교실로 들어왔다. 흠칫 놀라 뒤돌아보자 도서 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상급생 누나가 서있었다. 누나는 나를 힐끔 보더니 작게 손짓하고, 책상 서랍을 뒤적이고 곧장 나갔다.

오월의 따스한 바람과,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그리고 사람들 소리, 먼지 냄새 따위가 어우러져 몹시 혼란스러웠다. 관자놀이가 또다시 욱신거렸다. 마치 무언가 태어나려는 듯. 생각해보니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해주신 말이었는데, 나는 할머니에게 왜 여자만 임신을 하냐고 물었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사람은 누구나 임신을 한단다. 자기 자신이라는 아이를 품고 살아가지. 그러나 어느 정도 때가 지나면 그 아이를 잊어버린단다. 그대로 몸속에서 사라지는 거지. 그 아이가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은 공허함을 느낀단다. 나는 사람들이 타락하는 이유가 그 공허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단다. 만약에 사람들이 자기 자신으로만 살 수 있다면, 세상은 틀림없이 좋은 곳이 될 것이란다.”

오월의 햇살 속에 어렴풋이 할머니가 보였고, 나는 바보처럼 눈물을 흘렸다.

“누나.” 내가 말했다. 그러자 철학책을 만지작거리며 “100번대.” 하고 중얼거리던 상급생 누나가 날 보았다. “나?” 누나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오!” 누나가 짧게 감탄했다. “신기하네. 우선, 첫 번째로 네가 날 누나라고 부른 게 신기해. 맨날 ‘선배님, 선배님’이라고 불렀는데, 갑자기 누나라고 부르니까 기분이 조금 신기하다.” 상급생은 안경을 고쳐 쓰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다고 내가 널 좋아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니까 조금 낯설어서 그렇다고.” 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배가 말을 이었다. “두번째로, 지금 생각해보니까 네가 왜 그곳에 있었지? 아니 그거야말로 신기하네. 왜 그곳에 있었어? 생각해보니까 너는 1학년이잖아. 왜 2학년 교실에 있었던 거야. 그것도 내 교실에.” 누나는 눈을 살짝 찌푸려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여자들은 때때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어머니에게 크게 혼나고 나서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곧장 답을 하는 대신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그러자 상급생은 더욱더 경계심 그득한 얼굴로 날 노려보았다.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하려고 결심했을 때, 옆에 있던 사서 선생님이 헛기침을 했다. 선생님의 늙은 관자놀이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얼마 전부터, 앓지 않던 편두통까지 앓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요.” 거짓말을 할 때마다 나는 습관적으로 등뒤에서 두 손을 깍지 끼고 어깨를 배배 꼰다. 지금도 그랬다. “혼자 교실에 있던 그애한테?” 선배가 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네! 세 번째로, 난 그게 신기해. 그애는 완전 싸이코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사서 선생님을 쳐다보자, 사서 선생님이 만족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소문에 의하면 어떤 대기업 중손자라고 하던데, 생긴 것도 그렇잖아? 재수 없게 잘생겨서. 인기깨나 있어. 좋아하는 애들은 좋아하지. 그런 애들은 잘생겼으면 침팬지도 좋아할 애들이야. 그런 부류들이지. 내가 정말로 혐오하는 부류!” 선배가 한껏 힘주어 말하는 바람에 주머니에 아슬하게 걸쳐있던 수첩이 떨어졌다. 표지에 최근 들어 인기를 끌고 있는 남자아이돌 사진이 큼지막하게 붙어있었다.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수첩을 주워 들고 ‘그애를 좋아하는 부류의 여자애들’에 대해 실컷 험담했다. 도무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자, 사서 선생님이 점잖게 주위를 주었다. 그러자 선배는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낮추었다. 그와 동시에 목소리도 작아졌다. “아무튼.”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그애는 싸이코야. 공부는 잘하는데, 어떻게 잘하는지 모르겠어. 야자도 맨날 빠지고 그러는데! 어쩌면 돈으로 선생들을 매수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새로 온 젊은 여선생이랑……” 그쯤에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서 그랬다. 선배는 당황했으나 내가 워낙 단호하게 행동해서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가서 나를 두고 “그 녀석, 알고 보니까 완전 싸이코야.”라고 말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정말로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사서 선생님 근처로 갔다.

주변이 잠잠해지자 사서 선생님이 나에게 자그맣게 손짓했다. 선생님은 자리에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학생에 대한 일은 어떻게 됐니?” 나는 곧장 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주름진 얼굴에 거짓말할 정도로 대담하진 못했던 탓이 컸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오늘 한번 더 왔었어. 이전에는「노인과 바다」를 잃어버렸다고 하더니, 오늘은「이방인」을 잃어버렸다고 하더군. 아예 현금을 가지고 왔었지.” 선생님은 이마를 찌푸렸다. 미간에 주름이 두세 개 더 늘어났다. “여기가 편의점도 아니고, 뻔뻔스럽게 나에게 잔돈을 거슬러 가는 꼴을 보자니……” 선생님은 교묘한 자제력을 발휘하여 가까스로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막았다. “어쨌든 학생이 다시 한번 잘 말해주었으면 좋겠네. 그 학생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학생밖에 없어 보이니까.” 알겠다고 답하고 나서 곧장 도서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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