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을 다시 만나기 위해 2학년 건물을 드나들기 시작한 이후로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정규 수업이 끝난 후 녀석을 찾으러 2학년 교실까지 갔으나 그날도 녀석은 없었다.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고 물어볼 생각도 했으나 잠자코 있었다. 녀석과 친하다는 인상을 주어서 내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녀석이 있는 교실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주가 바뀌고, 사서 선생님이 편두통으로 이틀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을 때, 녀석이 도서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서 선생님의 빈 자리를 위원회 학생이 대신하고 있었는데, 녀석은 내가 그 역할을 맡고 있을 때 나타났다.
“이번에「데미안」을 잃어버렸는데, 책값이 구 천원이더라고요,” 고갤 들어 녀석을 보자, 녀석이 씩 미소지었다. “너구나?” 녀석이 말했다. 그러더니 내게 대뜸 만 원을 건넸다. “천 원은 네 마음대로 써. 만 원을 다 써도 좋고. 그나저나 학교 끝나고 나 좀 보자. 할 말이 있어. 꼭 하고 싶은 말이.” 나는 형식적으로 답했다. 그러니까 존댓말로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따위의 말을 했다. 도서실 대출 위원 같은 공적인 자리는 물론이고 사적인 자리에서도 누군가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랬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 나는 다시 녀석을 찾아갔다. 녀석은 2학년 건물과 1학년 건물이 이어지는 복도에 서있었다. “야자 해야 하는데.” 내가 속삭이듯 말하자 녀석이 웃었다. “하루쯤은 빼도 돼. 나는 맨날 빠져. 어디 아프다고 해.” 나는 거절했다. 그럴 순 없다고 했다. 어른들에게 거짓말하고 싶진 않다고 덧붙였다. 그에 더해 담임 선생님은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어른 중 하나였기에 더더욱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녀석이 내게 제안했다. “그렇다면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오늘만 야자를 빼겠다고 말해 봐.” 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내게 오 만원짜리 지폐를 건네며 말했다. “결과는 상관 없이 네가 묻기만 한다면, 이걸 너에게 줄게.” 때마침 요즘 들어 눈길이 가는 같은 반 여학생이 지나가고 있었기에 오 만원짜리 지폐를 빼앗듯 움켜쥐고 교무실로 뛰어내려갔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새빨간 얼굴로 그저 되는 대로 담임 선생님께 말했다. 그러자 담임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까 오늘 하루쯤은 쉬어도 좋아. 여자친구가 누구니? 우리 학교 학생이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처음으로 진실을 말했는데, 오히려 기분이 이상했다.
학교를 빠져 나와 녀석과 함께 걸으며 그에 대해 말하자 녀석이 답했다. “진실도 그렇고 거짓도 그렇고, 입에 배면 똑같아. 무엇을 말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사실 사람들은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도 잘 구분하지 못해.” 교문을 지나 횡단보도에 다다랐을 때 나는 녀석에게 오 만원짜리 지폐와 만 원짜리 지폐를 건넸다. 녀석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돈 따위에 나를 팔지 않아. 너나 가져. 그리고 만 원짜리는 구천 원으로 바꿔와.” 그러자 녀석이 웃었다. “넌 역시 마음에 드는 놈이야. 내가 너에게 이것에 대해 말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지.” 녀석이 바코드가 그려진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정말, 가끔은 신이 있다고 믿을 때가 있어. 어떻게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걸까. 왜 하필 그 사람이 눈에 들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내가 그 사람과 이어졌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 말이야.” “우연이겠지.” 내가 지적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녀석이 맞장구쳤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운명이겠지. 너랑 내가 만난 일처럼 말이야.”
그날 녀석을 따라 녀석의 집까지 갔다. 회장 누나가 말했던 대로 녀석은 금수저였다. 목을 아무리 뒤로 젖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아파트, 그것도 꼭대기 층에 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녀석에게 금수저냐고 대놓고 물었다. 녀석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지만 그리 행복하진 않다고 덧붙였다. 그건 물어보지 않았다고 말하자, 녀석은 “너란 놈은.”이라며 혀를 찼다. “그런 게 마음에 들어.”
집은 축구장보다 넓어보였다. 녀석을 놓치면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녀석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았다. 어찌어찌 녀석의 방에 들어서자 뻣뻣했던 목이 조금 풀렸다. 다짜고짜 녀석이 말했다. “두서 없이 말해서 미안한데, 난 네가 이걸 바코드라고 부른 것이 너무 화가 났었어.” 녀석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어딘가 이전과 달라보였다. “바코드라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거잖아! 넌 내가 왜 책을 잃어버리는지 알아?” 난 모른다고 했다. “책에 있는 바코드를 떼내기 위함이야. 내가 왜 그러는지 알아?” 나는 묻지 말고 곧장 말하라고 했다. “그게 내게 소중한 책이기 때문이야. 나는 중학교 때부터 그랬어. 난 보다시피 금수저고, 나름 유복하게 자랐지만, 그리 행복하게 살진 못했어. 위에 형도 누나도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거의 내논 자식처럼 자랐지. 그래서 성격도 이 모양이지, 뭐.” 녀석은 정신 없이 손을 휘저었는데, 그 때문에 고장난 풍선 인형처럼 보였다. “그래도 나는 내가 좋아. 이렇게 사회에 저항하고 있는 내가 좋다고.” 녀석과 눈을 마주하자 녀석이 말을 이었다. “사회에 저항한다고 해서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진 마. ‘가진 자들을 무너뜨리겠다!’ 그런 말이 아니야. 그냥, 남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는 부품이 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어. 적어도 부품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한 일을 하고 싶지. 그래서 이 책들을 해방시킨 거야.” 녀석이 서랍을 열자, 익숙한 책이 여러 권 보였다. “이 책에 바코드가 붙어 있으면, 이 책은 도서관의 수많은 부품 중 하나일 뿐이겠지. 하지만 바코드를 떼면, 이 책은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인 책이 돼. 그래서 내가 그랬던 거야. 어떻게 말하다 보니까 서론을 말하게 된 기분인걸.” 녀석은 그제껏 휘젖던 손을 차분하게 허벅다리에 놓고 말했다. “나를 바코드라고 부르지 마. 아니 이 모양을 말이야. 이건 바코드가 아니야.”
“그럼 뭔데?” 내가 되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때 나는 좀 무례했다. “이건 덴달리안이 그려준 그림이야. 망할! 그때도 말했잖아.” 녀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내가 그림을 망쳐서 이렇게 그리는 게 최선이었어. 나는 그 그림을 잃고 싶지 않았거든.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나를 위해 그려준 그림을 잃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덧그리다 보니까 이렇게 됐지. 사실 처음엔 이러지 않았어. 어느 순간부터 그냥 이렇게 까만색과 하얀색을 덧칠하게 됐는데, 어쨌든 절대 바코드는 아니야. 나는 바코드 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그게 가장 싫어. 그러니까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부디 이것을 바코드라고 부르지 말아줘. 아니 그래주었으면 해.” 녀석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부탁이야.” 녀석이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답지 않은 모습에 조금 놀랐다. 문득 할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답지 않은 모습을 보았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제대로 알게 된 거란다.” 그래서 나는 곧장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녀석은 아주 즐거워했다.
해가 지고 한강이 붉게 물들 무렵에 내가 말했다. “누구보다 현명한 할머니가 왜 사랑밖에 할 줄 모르는 할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했을까.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아.” 침대에 발을 올려놓고 바닥을 등받이 삼아 책에서 바코드를 떼내고 있던 녀석이 피식 웃었다. “너는 모든 걸 이해하려고 하는 게 흠이야.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어.” “나도 알아. 나도 아는데, 그런데 그걸 이해하기가 어렵네.” 녀석은 책을 내려놓고, 바닥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기지개를 켰다. 크게 하품하는 소리가 나고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나도 덴달리안을 만나기 전까진 그걸 몰랐어.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
그날 녀석은 나를 아파트 정문까지 바래다 주었고, 마지막으로 내게 책에서 떼낸 바코드를 주었다. 당황스러워서 녀석을 쳐다보았으나 녀석은 씨익 미소 지을 뿐이었다.
“친구야.” 전화기 너머 녀석이 말했다. “너는 내가 이해가 가지 않지?” 얼마 전부터 맞추기 시작한 루빅큐브를 이리저리 돌리며 나는 사람은 누구나 불가해한 부분이 있다고 답했다. 녀석이 웃었다. “너는 나보다 더한 놈이야. 절대 여자 못 사귈 놈.” 너는 어떻냐고 되묻자, 녀석이 한숨 쉬며 답했다. “나는 적어도 여자를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놈이야. 바코드가 뭉개졌던 이유도 그거고. 바보 같이 울어 버리는 바람에, 네가 나를 바코드라고 부르게 됐잖아. 진짜 어이가 없어. 하지만 난 그런 내가 좋아. 덴달리안을 사랑하고 있는 내가 좋아.” 대충 답하고 나서 왜 방학식도 하지 않았는데 조부모님 댁으로 갔냐고 묻자,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덴달리안이 방학이라서 그랬다고 답했다. “어차피 며칠 빠져도 학교는 그냥 학교일 뿐이야.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학교는 내가 아니니까. 나는 집단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넌 충분히 그렇게 살고 있다고 답하자, 녀석이 소리 내어 웃었다.
“덴달리안에게 그림을 다시 그려달라고 했어?” 내가 묻자, 녀석은 난생 처음 말하는 사람처럼 말을 더듬었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사회에 있는 한 어떤 곳에 가도 결국 나는 부품이 될 거라는 생각 말이야.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얼마나 괴로운지 몰라.” 녀석이 잠시 말을 끊었다. “내가 ‘나’로 산다고 해도 내가 부품인 건 달라지지 않잖아?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차라리 네가 말한 대로 대마초를 피우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대마초를 피우면 덴달리안이 나를 싫어할 것 같아서 피우진 못하겠어.” 난 대마초를 피우라고 말한 적 없다고 지적했으나 녀석은 들은 체 하지 않았다. “생각을 해 봐. 우린 학생이야. 학교의 일부이고 부품이지. 우리가 없으면 학교는 돌아가지 않아.” 네가 없어도 네 학급은 잘 돌아가지 않냐고 묻자, 녀석이 큭큭 거리며 웃었다. “맞지. 너에겐 무슨 말을 못하겠다. 그니까 말하지 말고 계속 들어 봐. 그냥 들어 봐. 내가 너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주자면, 네가 만약에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그냥 입 닫고 여자가 하는 말을 계속 들어. 그러면 돼. 그게 네가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나는 답하지 않았다. 녀석은 이전보다 목소리를 키웠고, 때문에 녀석이 하는 말이 더 또렷하게 들렸다. “내가 만약에 평범한 회사원이 된다고 해 봐. 그렇다면 나는 그 회사의 부품이 되는 거겠지. 그건 당연한 일이야. 회사원은 흔하디흔한 존재니까. 그런데 내가 CEO가 된다고 해도, 나는 그저 부품에 지나지 않아. 왜냐면 내가 없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체할 거니까 말이지.” 내가 뭐라고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녀석이 덧붙였다. “물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바뀌는 건, 한 조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사원 한 명이 바뀌는 거랑 사장이 바뀌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일이지. 하지만 중요한 건―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사장이 될 거란 거야. 난 그게 싫어. 하물며 대통령도 그렇잖아. 대통령도 임기가 있고 때가 되면 바뀌잖아.” 그렇다면 차르가 되고 싶냐고 지적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녀석이 계속 말했다. “그렇다는 생각이 드니까 인생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져. 똑같은 음악만 나오는 싸구려 라디오 같다고 생각했지―단조롭기 짝이 없지! 내가 무엇이 되든 결국 나는 무엇의 부품이 될 테니까. 그렇다는 생각이 드니까 진짜 죽고 싶더라고. 그런 마음을 담아 유서를 썼어.” 녀석은 잠시 침묵했다. “다행히,” 낡은 스피커에서 하울링이 생기듯 녀석이 소리 높여 말했다. “덴달리안을 만나자 그런 생각이 사르르 녹아서 사라졌지. 그래서 그 유서를 너에게 보냈어. 내가 갖고 있기엔 위험하고, 휴지통에 버리자니 그것도 불안하고, 그래서 네가 갖고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너에게 보냈어.” 나는 뭐라고 답하지 않았다. “생각해 봐. 우리는 머지 않아 성인이 될 거야. 성인이 되면 어떻게 살까,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나는 없다고 답했다. “나도 그래. 그렇다고 말하니까 나를 둘러싼 모든 어른들이 대학교라도 좋은 곳으로 가라고 말하더라고. 아버지는 아예 특정 대학교 이상 가지 못하면 재수를 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 나는 알아. 아버지가 나만큼 고집쟁이라는 걸. 그래서 어떻게든 공부는 해야겠더라고. 그게 아니라면 집을 떠나든가. 사실 지금 당장에도 나는 먹고 살 수 있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금수저고, 나름대로 용돈을 많이 받으며 자랐지. 나는 그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돈을 만들어내는 기계를 만들었어.” “그것 참 대단하네” 그렇게 답하자 녀석은 신이 난 듯, 빠르게 이어 말했다. “투자를 한 거지. 나름대로 공부해서.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싶어.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간절했지. 만약에 내가 돈이 없다면 무언가의 부품이 돼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투자에 대해 많이 공부했고, 사치만 부리지 않는다면 일하지 않고도, 그러니까 무언가의 부품이 되지 않고도 먹고 살 돈이 나올 기계를 만들었지. 그래서 사실 공부라는 것도, 대학교라는 것도 그닥 나에겐 동기부여가 안 돼. 애초에 대학교에 가는 이유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대학교에 가서 좀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녀석이 잠시 말을 잃었다. “그렇겠지. 그렇지만 난 솔직히 덴달리안 곁에 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좋아. 그냥 이 시골에 집을 짓고 덴달리안과 살고 싶어. 같이 살진 못하더라도, 매일 만나고 싶어. 그런데 내가 대학에 가면 그렇지 못하잖아. 그래서 얼마 전에 생각해낸 게 하나 있는데, 한번 들어 봐.” 녀석이 말을 끊자 주변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녀석이 속삭이듯 말했다. “덴달리안이 내게 제안한 거야. 내가 명문 대학교를 가면, 나를 과외 선생님으로 뽑겠대.”
“네가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한 거야?” 기나긴 적막을 깨고 내가 물었다. “아니.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나는 덴달리안 앞에만 서면 이상해지거든. 그냥 영문도 모르고, 이상한 말만 지껄여. 그러면 덴달리안은 웃어.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 아마 너도 미칠 거야. 그럼 나는 얼어붙고, 덴달리안은 나를 가지고 놀지. 나는 알아. 덴달리안이 나를 갖고 노는 게 아니라는 걸. 내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걸. 그러니까,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이야?” 내가 물었다. 큐브를 창틀에 놓고 벽에 기대어 누웠다. 어머니께서 저녁을 먹으라고 소리친 걸 들었기에 얼른 통화를 끝내야 했다. 그랬던 탓에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녀석은 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큐브를 다시 엉망으로 만들고 나서 또다시 맞추기를 반복했다. 세 번째로 다 맞출 때까지 녀석은 말이 없었다. “최근 들어 새로 생각해낸 게 하나 있어. 부품이 되지 않는 방법.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방법. 곰곰이 되짚어보니까 나는 오래전부터 답을 알고 있었더라고.” “그게 뭔데?” 내가 묻자, 녀석은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웃는 건지, 아니면 우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바로 사랑이야.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면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돼. 부품이 아니게 되지. 너라면 그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어. 사랑을 이루면 가정의 한 부품이 되는 게 아니냐고. 그렇다는 생각이 나를 줄곧 괴롭혔지. 반박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나는 이제야 알겠어. 그건 부품이 아니야. 그건 절대 부품이 아니야. 사랑으로 꾸린 가정은 기계가 아니니까. 기계는 절대 사랑을 할 수 없잖아? 안 그래? 이건 너도 반박할 수 없겠지? 그렇잖아?” 녀석이 하도 물어대는 탓에, 나는 그만 질려버렸다. 그래서 그렇다고, 네 말이 다 맞다고 답했다.
거꾸로 서있는 고드름이 녹아서 바닥을 향해 물방울을 토해내던 날에 방학식이 있었다. 방학식이 끝나고 잠시나마 도서실의 주인이 된 우리는 파티를 열었고, 나는 혼자 밖으로 나와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져 갔다. 세상에 혼자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줄곧 나를 괴롭혔다.
“너, 또 혼자야?” 녀석이 다짜고자 물었다.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방금 전 방학식이 끝났고 도서실에서 위원회 학생끼리 파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쫑파티지. 그렇게 부르더라고.” 내가 덧붙였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너랑 파티는 절름발이야. 어울리지 않아. 왜 그런 곳에 간 거야? 그냥 아프다고 하고 빠지지 그랬어.” “나도 그러려고 했어. 그랬는데……” 내가 말이 없자 녀석이 되물었다. “그랬는데, 뭐? 또 거짓말하기 싫다는 정의로운 자아가 등장해서 네 입을 가로막았다, 그런 말을 하려고 하는 거야?” 난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뭔데? 뭐 때문에 그렇게 망설이는 거야. 친구야. 네가 아닌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마. 넌 그냥 너야. 내가 아는 너는 그렇게 소심하지 않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시원하게 말해 버리라고. 처음이 어렵지. 사실 처음만 어려워.”
난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녀석은 볼 수 없었겠지만. 이윽고 녀석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덴달리안과 사랑을 이룬 거야?” 녀석은 당황한 듯 재채기를 하려는 사람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결국 녀석은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묻지도 않았던 덴달리안을 왜 덴달리안이라고 부르는지에 대해서도 실컷 떠들어댔다. 녀석이 말한 바에 따르면, 덴달리안은 민들레의 영어 이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덴달리안이라고 부르는 그 아이는 마을에 있는 모든 민들레를 불었다고 하며, 그로 인해 마을에 사는 사람 수는 해가 지날수록 줄어 들었으나 민들레의 개체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고 녀석은 장황하게 설명했다. 끝으로 덴달리안과의 사랑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꺼져가는 불씨처럼 자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제 네 이야기를 해 봐. 다른 건 몰라도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녀석이 투덜댔다. 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오라고 해서 온 거야.” 녀석이 뭐라고 말했으나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했다. “할머니가 이야기했던 사랑을 조금 알 것 같아.”
도서실로 들어서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나를 빼고 너댓 명이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한 서른 명이 모여서 파티를 벌이는 것 같았다. 여자아이가 웃는 소리, 남자애 특유의 허영심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커다랗게 떠드는 소리, 멜로디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 단조로운 소음들.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길래, 나는 장염 때문에 학교에 나오지 못한 사서 선생님 자리로 갔다. 자리에 앉아 부질없이 주변 눈치를 보고 나서, 녀석이 내게 준 바코드를 하나씩 찍어보았다. 단 하나만 빼고 기록이 없었다. ‘유효하지 않은 바코드입니다.’라는 문구가 화면에 떴다.
녀석이 구천 원짜리 지폐와 함께 준 바코드, 사서 선생님이 알지 못하는 탈선한 바코드를 만지작거리며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싱그러운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해?” 큐브를 맞추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끙끙거리는 같은 반 여자아이였다. 녀석에게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그 아이.
나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했다. 당황하여 손을 움켜쥐자 흐물거리는 종이 뭉치가 느껴졌다. 그 아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점점 손바닥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러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약에 땀방울이 바코드를 뭉개 버리면 어떻게 될까. 녀석의 눈물이 덴달리안의 그림을 뭉개버렸듯이.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사서 선생님께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리고 인식할 수 없는 바코드는 도대체 무엇일까.
“내 이야기, 듣고는 있는 거야?” 그 아이가 소리쳤다. 그렇다고 답했다.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 아이도 따라 웃었다. 머리론 이해할 수 없지만 나는 나를 향해 웃고 있는 아이에게 루빅큐브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녀석이 결국 시인했듯, 나도.
“나를 사랑하기 위해선 남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단다.” 언젠가, 바코드도 떼지 않은 곰인형을 가지고 투닥거리는 나와 친척 동생에게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늘 그렇듯 인자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렇게 난 조금씩 삶과 사람과 사랑 같은 불가해한 영역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뭉개진 바코드를 그대로, 유서로 감싸, 유서와 그것의 주인에게 보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녀석이 내게 전화 걸어 보답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은 날, 나는 창 너머 세상을 누비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바코드를 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루빅큐브를 열심히 맞추고 있는 민들레씨를 보았다. 찰나였으나, 모든 소음, 모든 사랑이 나처럼 느껴졌고, 그런 순간이 영원처럼 이어져 있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