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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역설

두 가지 욕망

by 헤세

인간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흔히 욕망이라고도 부른다. 인간의 욕망은 문명을 창조하고 세상을 움직인다. 인간의 욕망 근저에는 필요와 결핍이라는 욕망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이 아닌 동물에게도 욕망은 있다. 우리는 그 욕망을 본능이라고 부른다. DNA에 각인되어 학습되지 않고 유전된 행동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동물에 속하는 인간에게도 본능적 욕망이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세네카는 이를 욕구라고 불렀다. 생존에 필요한 욕구. 먹는 것, 자는 것, 번식에 대한 욕구이다. 자연 선택된 형질이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종의 멸절이 찾아온다. 호모사피엔스에게는 한 단계 더 높은 욕구가 존재한다. 바로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소유의 욕구이다. 세네카는 이를 욕망이라고 불렀다. 욕망은 욕구와 다르다. DNA에 새겨진 게 아니고 학습된다. 학습되었다는 말은 훈련을 통해 조절과 통제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힘과 추상의 힘을 갖게 된 인간은 상상으로 욕망한다. 개인이 처한 문화권과 환경에 따라 그 상상의 내용과 규모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자본이다. 문화자본이란 특정 문화나 사회 안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지식, 취향, 언어능력, 교육 등 무형의 가치를 의미한다. 어떤 문화자본에 노출되었는가에 따라 욕망의 내용과 질이 달라진다. 이러한 욕망을 나의 식으로 구분해 보자면 결핍에 따른 충족의 욕망이 있고 자기 성취를 위한 도전의 욕망이 있다.




결핍의 욕망이란 스스로 부족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그것을 채우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내재화하는 것이다. 가난, 사랑, 장애 등 성격이 형성되는 어린 시절부터 결핍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결핍은 결핍의 충족을 위한 강력한 에너지가 된다. 모순이지만 말을 더듬는 사람이 가장 말을 잘할 수 있는 모티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일도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한 가지 측면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관건은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긍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결핍을 성공을 위한 모티브로 활용할 수 있지만 만약 부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절망하고 좌절하며 실의에 빠질 것이다. 스토킹은 애정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 중 대표적인 부정적 사례이다.



성취를 위한 도전의 욕망은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격려와 칭찬의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은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격려와 위로를 받으며 다음 도전을 준비한다. 결핍이 없어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이유이다. 반면 ‘해보라’는 말보다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들으며 격려와 칭찬보다는 비난과 통제의 말을 많이 하는 문화권에서 성장한 사람은 소심하고 위축된다. 안전한 길만 선택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한국사회가 대표적이다. 이 모든 것은 유년시절에 이미 내면화된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이를 뒤바꾸는 것은 아주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스스로 각성해야만 가능하다.


욕망은 부작용도 있다. 내가 가진 욕망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잘 모르면 욕망의 노예가 된다. 내가 어떤 문화자본에 속해 있는가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한 가정만 문화자본을 소유하는 게 아니다. 공동체나 국가도 문화자본을 가지고 있다. 나를 부추기는 가장 큰 욕망은 자본주의이다. 돈을 소유하면 나의 욕망을 채울 수 있다는 신념이 가장 강력하게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이다. 이유는 분명 존재한다. 한국사회가 성장기에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결핍을 체험하고 그 결핍이 성장의 에너지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디까지 가야 결핍의 충족이 완성될까? 우리는 여전히 가난한가? 가난은 두 가지가 있다.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 한국사회는 이미 절대적 빈곤은 오래전에 벗어났다. 상대적 빈곤만 존재한다. 옆 사람과 비교해 보니 내가 가난한 것이다. 욕망은 학습된다. 환경 속에서 학습된다. 그래서 조절과 통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내가 나의 욕망을 똑바로 볼 수 있다면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부의 기준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좋은 집, 좋은 차 이런 거 말고. 좀 더 여유로운 삶. 텃밭을 가꾸며 이웃과 함께 하는 문화. 지방을 살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조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로 해결해야 하지만 비교를 통한 가난의 문제는 내가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영역도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도 완전하지 않다. 성장과정에서 자녀를 어떤 결핍도 없이 온전하게 양육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 말은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내면 안에 크든 작든 다양한 형태의 결핍을 지니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결핍을 자아성찰을 통해 인식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결핍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다. 열등감은 그러한 결핍이 밖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형태이다. 열등감을 잘 살펴보면 원인이 되는 결핍의 요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큰 성취를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결핍의 욕망에서 도전의 욕망으로 자신의 욕망을 전이시키면서 역사의 진전을 이루어내는 사람을 주변에서 목격하기도 한다. 흔히 말해서 세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서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두 가지 방향의 접근이 필요하다. 내게 결핍이 있다면 그 결핍의 충족, 극복을 통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아무런 결핍이 없다면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나서서 움직이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새롭게 열리는 것이다. 그 가운데 고난과 고통은 통과의례이다. 고통을 피하지 말기를. 내가 중력의 힘을 거스르며 고통스럽게 산을 오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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