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레노베이션을 하면서 도배를 새로 해야 했다. 처음 생각은 올리브그린의 낡은 듯 따뜻한 느낌의 벽지를 바르고 원목가구를 배치해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의 거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고흐의 <별이 흐르는 밤>이 한쪽 벽을 채우면서 나머지 벽지 색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에 빠졌다. 쳇 GPT는 분위기에 따라 연한 베이지색, 아이보리, 민트, Steel blue를 추천했다. 상점에 가서 샘플북을 들고 와 쳇 GPT가 추천한 색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거실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았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고흐의 그림이 조화롭기를 바랐다. 그러기엔 파랑이 적절했고 조금 짙은 색이 알맞다고 생각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딥블루, 너무 어두워지는 걸 고려해 금박이 박힌.
언제나 파랑으로 흐른다. 어느 색을 고려하든 마지막은 파랑으로 결론이 난다. 이것은 그 아이 때문이다.
운이 좋게도 나는 종종 영화 같은 비현실적인 순간들을 살았다. 1997년. 그녀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늘 파란색의 편지지에 파란색 펜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날의 기분이 담긴 명도가 다른 파란색의 a4이기도 했고 파란색을 주제로 한 잡지의 한 페이지이거나 파란색으로 덮인 영화 포스터이기도 했다. 그녀의 파랑은 너무도 친밀하게 거침없이 나를 잠식했다. 그 이상으로, 그 생경함이 깨웠던 호기심과 궁금증이 인도했던 그 너머의 세상은 꿈처럼 몽롱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순간이 만들어낸 부산물이라 생각한다.
모든 파란색의 이름을 알았고 색으로 우울의 깊이를 잴 수 있었던 그녀는 나를 dark blue라 불렀다. 스스로를 prussian blue라 소개했던 그녀는 아마도 내가 정서적 공허를 공유할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함께 비틀거리며 랭보, 이상, 기형도 같은 천재 시인들에 열광했고 배수아의 메마른 문체에 동감했고 몽환적인 영화 대사들을 오래오래 함께 되뇌었다. 비 오는 날에 우산 없이 오래 걸었던 기억, 계획 없이 떠났던 여행, 함께 들었던 음악과 함께 봤던 영화, 노을에 스며있던 소금기 머금은 바다 냄새, 무엇이든 쓸 수 있었던 파란색의 편지지...
비틀거렸던 시간을 멈추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넘어질 때까지 기꺼이 내려놓았던 그 시간은 프랑스 영화보다 몽환적이고 지브리 영화의 파란 하늘보다 비현실적이었다. 1999년, 강렬했던 그 시간이 저물고 오랫동안 나는 파란색앓이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텅 빈 마음을 채웠던 그 파랑의 시간이 남은 시간을 살게 했다.
오래된 기억이다. 여전히 선택의 길에서 나를 지배하는 파랑의 기억.
Prussian, 너는 여전히 파랗게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