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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Jul 18. 2021

다섯 번째 계절


있잖아 사랑이면 단번에 바로


알 수가 있대


헷갈리지 않고 반드시


알아볼 수가 있대


이제 난 그 사람이 누군지 확신했어






아 - 좋지, 동화 같은 사랑노래라 이런 사랑을 꿈꾸고 상상했던 어린 시절이 연에게도 있었지. 그렇지만 제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벌컥 마시곤 다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지. 참나, 사랑? 그런 거 다 판타지 아니었어? 지난 구애인들을 떠올리면 하나같이 다 착잡하다. 옛날의 난 뭐에 씌었던 게 분면하다. 아니 십 대와 이십 대 때는 도대체 왜 그렇게 운명적 사랑에 갈증을 느꼈던 건지. 애초에 없는 건 줄 진작 알았다면 그렇게 용감하게 뛰어들진 않았겠지. 각종 미디어에선 사랑에 대한 온갖 추앙을 내보이던 시절이었으니까. 뭐 지금도 딱히 달라지진 않았지만. 그 시절의 연에게 사랑이란 숨겨진 미지의 보물이었다. 그 보물을 얻고선 고향에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모험가이자 용사였다. '사랑'이란 보물을 안고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은 버려둔 지 오래고, 지금의 연은 고향인 인현 시를 떠나 대도시의 중견기업에서 마케터로 근무하고 있다.



외부 거래처 담당자를 만나 이번 컬래버레이션 제품에 대한 협의를 위해 출장을 나왔는데 기껏 시간 맞춰서 도착했더니 늦는다는 담당자에 열불 나 1층 카페테리아에서 음료 한 잔 주문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연의 회사도 아니고, 담당자의 회사로 찾아왔는데 이렇게 늦을 수가 있나, 우리가 뭐 학생도 아니고, 사회 초년생도 아닌데 이렇게 시간 약속 안 지켜서 뭐가 제대로 되겠냐고!!! 그렇다. 연은 화가 많은 보통의 대한민국 사노비 (직장인)이었다. 가끔 속마음과 해야할 말이 반대로 나오긴 하는데 연은 놀라지않는다. 능숙한 사회생활로 유연하게 회피하고 방법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젠 카페인 때문에 마시는 게 아니라 거의 없으면 죽는 수준으로 매일 스마트폰에 충전기를 꽂듯 하루에 두세 잔은 기본으로 들이켠다. 음미는 개뿔.

 


컵에 맺힌 물방울이 표면을 따라 내려가 컵의 자욱을 나무 테이블 위로 진하게 남기고, 얼음은 본디 무슨 형태였는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제각기로 녹았고, 음료는 이제 절반도 체 안 남았다. 처음에 분노에 가득 찬 연은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며 돌아가면 해야할 업무가 태산이지만, 밖에서 이렇게 쉴 수 있다는 현 상황을 그냥 위안 삼기로했다. 뭐 제 잘못이 아니니 문제가 되더라도 거래처 담당자가 책임지겠지.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인지 재즈인지 모를 어중간한 음악을 들었고, 창문 밖의 거리에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을 바라보다가, 오들오들 떨며 길을 지나는 사람들 구경도 했다. 또 픽업 테이블에서 양손 가득을 안고도 겨드랑이 사이에 커피 두 잔을 안고 가는 저 신입의 모습을 보자니 제 자신의 과거를 보는 듯했다. 하 저런 사노비의 노비 짓을 내가 몸, 마음 다 애써가며 했더라지. 에휴. 이번엔 남은 음료를 벌컥 다 마셔버렸다. 아 근데 이 놈의 담당자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카페에서 혼자서 50분을 음료 한 잔을 시켜놓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뻘쭘했다. 제 친구들도 다들 바쁜 지 보낸 카톡에도 답장은 없고, 유튜브나 소셜사이트를 들어가도 이상하게 눈이 들어오는 게 없어서 그냥 화면을 꺼버린 채 폰을 뒤집었다.


한 시간이 좀 지나서였을까. 담당자가 허겁지겁 뛰어와서 연신 사과를 해선지 화가 좀 누그러졌다. 겨우 20만에 끝날 회의를 이렇게 한 시간 씩이나 기다리게 했나 기분이 나빠지려다가 담당자가 손에 쥐어준 모 프로그램 출연으로 유명해진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디너 식사권에 수그러졌다.  한 시간이 아니라 몇 시간을 준대도 이 레스토랑의 식사권을 따기란 저 태양 너머 별을 따기보다 어렵단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이게 웬 이득이나 싶었다. 손에  쥔  2인 식사권을 보며 누구랑 갈지 고민하던 차에 팀장에게 온 전화를 받았다. 네. 연이 씨 지금 출장 나가서 회의 중이지? 오늘 회사 돌아오지 말고 그대로 퇴근해. 제 말만 하고 끊은 팀장 놈에 쾌재를 불렀다. 다섯 시를 십 분여 남겨둔 지금 바로 퇴근할 수 있다니. 지하철에 제 자리가 있을 거란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아직 오후 다섯 시밖에 되지 않은 시간인데도 겨울이라 해가 금세 져서 어둑어둑했다. 눈이 녹다 얼은 빙판길을 평소보다 짧은 걸음으로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이 놈의 거래처 회사 지하쳘 역도 멀다. 연은 이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교통도 안 좋고, 앞으로 적어도 세 번은 더 와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뱉는 동시에 입김도 함께 나왔다.


연은 거리에서 전에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다. 발끝에 소복하게 쌓여가는 싸라기눈를 보면서  사뿐 저물어가는 노을의 작은 빛마저도 마음에 채였다.  그래, 사랑의 주체가 꼭 사람이어야 할 필욘 없지. 전부터 가지고 있던 찜찜함이 해결된 연은 전보다 더 가볍게 걸을 수 있었다.  겨울 지나 봄이 오기 전, 기온이 너무나도 제 마음대로라 이도 저도 아닌 계절. 우리나라가 정녕 사계절이 맞긴 한 건지 팔 계절은 아니었는지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다섯 번째도 아닌 두 번째 계절인가. 다섯 번째 계절이 오길 기다리려면 몇 번의 출근을 해야 하는가. 내일 또 출근할 생각에 급 우울해지지만, 그래도 내일은 금요일이니까. 오늘은 좀 날로 먹은 감이 없지 않아 있으니 기분 좋게 집에 가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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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은 코트 안주머니에 레스토랑의 식사권을 잃어버릴까 소중하게 넣어두고, 양 손을 주머니에 꽂아놓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르기 전 근방의 가게에 들러 저녁으로 먹을 칼국수를 포장하는 것도 잊지 않고서.



음.. 이번 글의 주제는 [다섯 번째 계절]이라는 가수 <오 마이걸>의 노래였는데요. 어쩌다 쓰다 보니 삼천포로 빠지게 되어 이게 무슨 글이지 도저히 알 수 없게 되어버려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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