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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Jul 27. 2021

그늘

편히 쉴 수 있는 그늘이고 싶은 맘


겨울엔 그늘을 기피하며 양지가 바른 곳으로 이리저리 움직여 다녔건만, 여름이 찾아오니 내리쬐는 태양볕을 기피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매일 쏟아지는 폭염주의보 알림 문자도 한몫했다. 그러니 도시에 얼마 되지 않는 나무 그늘 사이로 이리저리 움직여 길을 건넌다.

좁디 좋은 인도에 굳이 나무를 심어두는 이유가 뭘까 고민했더니 이런 장점이 있다. 봄에는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도 제법 아름답긴 하지만, 태풍에 휩쓸려 떨어지는 잎들과 나뭇가지들, 가을엔 우수수 떨어져 악취를 유발하는 은행. 바닥에 널브러진 은행을 피해 요리조리 발을 잽싸게 놀려보지만, 꼭 한 두 개는 밟아버리는 참사가 일어나곤 한다. 특히 아끼던 신발을 신었을 땐 그 슬픔이 배가 되었다. 겨울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 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왠지 모르게 길을 거니는 태하는 더욱 춥고 쓸쓸해진 듯했다.


이런 날 나무와 높은 빌딩의 그림자가 만들어놓은 그늘 사이로 요리조리 움직이지만, 엄마는 그늘 한 점 없는 내리쬐는 직사광선을 곧바로 받아 그곳에서 몇 시간째 허리 필 틈 없이 일을 할 것이 분명 하단 생각에 태하는 이번 연휴에는 '꼭 집에 내려가야지'라고 다짐을 하곤 한다. 그 다짐도 벌써 3년째이며, 지켜진 적은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보아 지난해와 동일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같은 시각, 배경화씨는 오색찬란한 누가 봐도 쿨톤의 쨍한 원색으로 가득한 옷을 입고서, 상의는 신호등보다 붉은 강렬한 새빨간 색이며, 바지는 제 옆에 있는 푸른 모보다 밝은 저 세상의 초록색이다. 턱끝까지 올린 넥워머와 머리 위로 둘러맨 두건, 그리고 그 위에 밀짚모자까지 얹어 중무장을 한 채로 도대체 저 차림은 무슨 패션인가, 눈 건강을 위한 보색 패션?이라는 의문을 들게 하지만 밭에 자란 잡초를 뽑고 있는 모습에서 너무나 타당한 패션이구나를 알 수 있었다. 그의 뒤에는 본인의 허리께까지 오는 뽑아낸 잡초 한 무더기가 가득한데도 허리가 가장 위로 향한 채로, 머리를 무릎께로 숙인 채 한창 태양이 중앙에 가까울 때에 머리 위로의 직사광선과 밭에서의 열기가 가득한 그 중심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 마냥 도무지 허리를 필 생각을 하지 않고 묵묵히 단순노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평소라면 푸른 대문 댁의 추이장이 동네방네 스피커로 일꾼들을 모집했겠으나, 추이장은 손녀가 태어난다며 자랑 자랑을 하곤 대도시의 산부인과로 훌쩍 떠나버렸다. 이런 때엔 제 어릴 적의 자랑만 내뱉는 수다쟁이 고추, 오이밭의 박영감이라도 있으면 도움이 되겠건만, 하필 일주일 전에 밭 근처 산에서 발견한 뱀술을 담가먹고 탈이 나 읍내 병원에서 검사를 받더니, 조그맣게 자라난 위장에 있는 종양을 발견해 서울의 모처 유능한 외과병원에 입원해있다. 그 외 다른 이들은 제 밭 가꾸라 바쁘고,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대형마트 부지보다 조금 작은 이 널따란 밭의 잡초를 배경화씨 혼자 뽑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묵묵하게 약 두어 시간 동안 잡초만을 베어 커다랗다 못해 광활한 밭의 잡초를 3분의 1이나 제거했다. 허리를 필 때 즈음엔 해가 질 무렵이라 등 뒤에 위치한 산자락 사이로 태양이 고개를 꾸벅 저문 모습이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움직인 배경화씨의 하루는 이제 3분의 1만 남겨놓고 있다. 베어낸 잡초들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 멀끔하게 몸을 씻어내고, 냉장고에 있는 남은 반찬들로 끼니를 때운 뒤에 공중파에서 해주는 일일연속극을 보고 나면 하루의 모든 일과는 마무리된다.


안방 귀퉁이에 잘 개어놓은 요를 꺼내어 바닥에 펼쳐놓고 베개와 이불을 툭툭 던져서 제 자리에 안착시킨다. 잠에 들기 전 문에 걸린 큼지막한 달력에 가서 두어 장 뒤에 있는 달을 확인하고선 빨간 숫자에 빨간색 볼펜으로 지이익하며 큰 동그라미를 그려 넣는다. 남들 다 차리는 연휴가 이제 와서 제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잡초를 한창 베고 있을 무렵, 자신의 딸에게 온 문자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확인했다. 별말 없이 이번 연휴에는 집에 꼭 들르겠다는 딸의 문자는 지지난 해에도, 지난 해에도 왔었지만, 딸에게서 오는 모든 문자를 혹여나 잊을까 항상 큼지막한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려 절대 잊을 수 없도록 한다. 안타깝게도 매번 준비한 연휴 음식은 오지 않는 딸아이를 기다리며 말라가고, 상해가곤 했지만, 이번에도 경화씨는 어렸을 적 딸아이가 좋아했던 동그랑땡과 고기산적을 만들기 위해 시장 볼 생각을 벌써부터 계획하고 있다.


잠자리에 누워 제 딸이 직장에서 너무나 바빠 쉴틈이 없는 것은 아닐까, 유약한 내 딸이 냉혹한 도시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 받지 않을까, 오늘 같은 날은 더욱더 잠들기 전에 근심에 사로잡힌다. 대학을 도시로 가서 7년 동안이나 경화 씨 곁을 벗어나 살고, 근 3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제 하나뿐인 딸이 유난히 보고 싶은 날이다. 무더위에 일하다 쓰러지진 않을까. 힘들면 다 내려놓고 제게 털어놓아도 될 텐데. 어릴 적부터 일찍 철이 든 탓에 뭐든 혼자서 하려는 성향은 저를 닮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안쓰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괜찮으니 제게 힘든 일을 털어놓고 불평불만을 쏟아내도 좋으련만. 매사에 무던한 경화씨지만, 제 딸에게만은 편히 쉴 수 있는 그늘이자 쉼터가 되고 싶은 맘이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여러 생각에 잠에 들긴 그른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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