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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Jul 28. 2021

향수

향수와 향수


고 은은 향수를 구입하기 위해 인근의 백화점에 들렀다. 평소라면 조향사인 친구의 공방에서 원하는 향을 시향 하고, 제 맘대로 섞어 만들곤 했는데, 그 덕에 조향사 친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이 동네 탐방도 할 겸 백화점으로 길을 나섰다.


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것도 익숙한 제 고향의 서울이 아닌 인현 시에 정착하다니. 모든 것이 낯섦 투성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은 잔뜩 변해있었고, 사람들의 말투와 문화, 유행도 전과 달라져 재빨리 익숙해져야 했다. 마치 자신이 파리로 첫 유학길을 뗀 그때와 비슷한 오묘한 기분에 유달리 신이 나기도 했다. 어서 빨리 이곳 사람이 되어야지. 고 은은 원래 익숙한 것보다 신비하고 새로운 것에 큰 매력을 느끼는 편이라 새로운 이와도 쉽게 친해지는 친화력, 요즘 말로 말하자면 소위 '인싸력'이 좋은 '인싸 중의 인싸'다.  그런 그였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고, 고 은의 발걸음은 지금 그 누구보다 설렘을 가득 담고 있다.



백화점에 1층에 들어서자마자 잔뜩 자리한 유명 코스메틱 브랜드. 이름뿐만 아니라 얼굴도 단번에 알 수 있는 한국, 외국 유명 셀럽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붙어있다. 제 상체 정도 크기의 큰 얼굴을 보자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모델이 브랜드의 얼굴이라 하지만. 한국은 여간 심한 정도가 아니었다. 또한 환한 낮에 백화점의 조명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지 각 브랜드마다 제각기 다른 조명들을 여러 개 붙여 누가누가 환하나 경쟁하는 듯했다.


고 은은 원체 사람을 좋아하고, 친절한 성향이긴 하나 한 곳에 수많은 브랜드를 모아놓은 모습 백화점은 그의 맘에 들진 않았다. 시끌벅적한 푸드트럭과 상점들이 즐비한 시장은 괜찮았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그랬다. 입구에서부터 가까운 조 말론, 디올, 샤넬의 향수를 차례로 시향 했으나 딱 제 취향인 것을 고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성 향수라고 플로럴 향과 가볍고 상큼한 향들. 브랜드는 다 달랐지만, 어째서인지 베이스 마는 동일한데 조금씩 변주만 준 비슷비슷한 향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렇다고 남자 향수를 맡아보니 열에 여덟은 손으로 촵촵 뿌려 양 뺨에 소리 나게 바르는 시원한 스킨향이 대부분이라 재빨리 코를 물렸다. 중성 향수를 찾았는데도 그중에 여성용과 남성용이 있다니, 심각한 모순이 아닌가.  한국이라고 특별한 향수는 찾을 수 없었다. 다 제가 파리에서 기억하는 향기였으며, 대부분이 그곳의 브랜드였기에. 아쉽지만 원래의 발걸음을 뒤로하고, 백화점을 유유히 나왔다. 한국의 향수 공방을 알아보거나, 친근한 제 조향사 친구에게 연락해야겠다며 생각했다.


고은은 미련 없이 백화점을 나와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위치에 있는 복합쇼핑센터로 향했다. 새 집엔 아직 가구가 많이 들어서지 않아 휑한 편이고, 파리에서 부친 짐은 아직 몇 가지는 오직 않았으며, 집에서 간단하게 요릴 해 먹기 위해 조리도구 몇 가지랑 식료품을 사서 돌아갈 생각이다.


우선 안내도를 슬쩍 훑어보곤 곧바로 3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담았다. 입구에선 커다란 쇼핑카트빼내어 가방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쇼핑에 나섰다. 어느덧 자취 10년 차인 고은에게 이런 일은 일도 아니었다. 프라이팬과 냄비 두 개, 국자와 뒤집개, 수저세트 두 개와 작은 포크 세 묶음, 나무도마랑 플라스틱 도마 하나씩. 그리고 과일칼과 식칼 하나씩을 고르곤 무늬 없는 단 색의 접시와 희미한 푸른색에 자그마한 음각무늬가 있는 밥그릇 두어 개를 담아 넣었다.  제 짐이 오려면 꽤 시간이 남은 듯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카트는 고개를 돌려 지하 식품코너로 향했다. 들어서자마자 있는 과채 코너에서 배추, 무, 상추, 양배추, 오이 등 싱싱한 초록 채소를 고르고, 달걀과 우유, 각종 간식거리와 먹거리를 가득 담았다. 처음 카트를 집었을 땐 이렇게 많이 담을 생각은 없었는데 어느새 카트 가장 위에 자리한 초코칩 쿠키가 떨어질까 위태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 은은 날렵하고 조심스럽게 카트를 운전해 카운터로 향했다.


"네!? 뭐라고요?"


제 친구가 준 쇼핑센터의 모바일 상품권의 바코드를 캐셔에게 당당하게 보여줬건만, 캐셔는 고객센터에서 지류 상품권으로 바꿔와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아아- 그 말을 듣고선 하하 웃으며 제 카드를 넘기곤, 배달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곤 캐셔가 준비해준 박스에 물건을 담고, 종이에 아직 익숙지 않은 집 주소를 핸드폰을 보며 따라 적었다. 오늘 6시 전에는 도착할 거란 말에 감사 인사를 하곤 2층에 위치한 고객센터로 향했다. 다음에 바로 상품권을 사용하기 위해선 미리 교환해놔야지.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대문짝만 하게 적혀있는 붉은 테두리로 적힌 고객센터에 곧바로 향했다. 캐셔는 고객센터에 있는 키오스크를 이용해 교환하란 말을 남겼지만, 도착했을 때 기기의 앞에는 A4지에 '고장,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해당 업무는 직원을 통해 이용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적혀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있는 번호표를 뽑아 대기석에 앉아 기다렸다.


띵동 하고 울리는 명쾌한 알림음과 번호판은 제 손에 쥐인 숫자와 동일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직원석 뒤에 위치한 문을 쾅 소리 내며 열고 들어온 남성이 한 직원을 불러 소리쳤다. 남의 직장 내에 이야길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워낙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다 보니, 내게 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너무나도 선명해서 미간이 찌푸려지지 않을 수가, 입꼬리가 뒤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의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확인하고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저렇게 천박한 인신공격이라니, 무지를 넘어선 무식에 치가 떨릴 정도로 얼굴이 붉어진 남자에게 몇 마디를 뱉어주니 아무 말도 못 한 채 다시 문을 쾅 닫고 돌아간다. 그 남잘 보니 성격 괴팍한 소형견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몸집이 작고 왜소하여 누구에게나 그르렁대고, 잔뜩 경계하는 치와와같이 말이다. 제 강자에겐 쉽게 꼬리를 내리고 약자에겐 앞발을 세우며 지랄하는. 아- 치와와는 귀엽기라도 하지. 저게 뭐람.


고 은은 멍하게 서있는 직원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제 모습을 보던 직원도 얼떨결 하게 앉아 업무를 도와주었다. 직원은 방금 일은 개이치도 않은 듯이 너무 친절하지도 않고, 불친절하지도 않게 딱 적당하게 업무를 도와주었다. 지류 상품권을 받고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되어 찝찝하고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발설되었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굳이 겪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 은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방금 전 무심코 튀어나온 제 말에 직원이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내심 걱정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상처를 후벼 파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녔기에 그저 묵묵히 감사인사를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화점 주차장에 주차해놓은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해서 씻고 나면, 방금 전에 구입한 물품들이 집에 도착할 것이다. 정리를 하곤 저녁을 딱 먹을 생각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곤 시동을 걸었다.



집에 배송 온 식료품들을 냉장고에 허겁지겁 넣고선 고 은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갑작스레 연락 온 기업 이사와의 식사자리 때문이었다.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축하한다며 밥 한 번 먹자는 말이 당연 인사치레하는 빈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한국인들에게 밥 먹자는 말은 그냥 할 말 없을 때 하는 인사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나름 슈트를 입어서 단정한 모습으로 자리에 나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름 고 은을 배려해 스테이크 집으로 선정했지만, 고 은을 잘 알았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학 중에도 굳이 식재료를 사서 유튜브로 요리 영상을 찾으며 한식을 만들어먹은 고 은이었다. 주변인들은 양식만 먹을 것 같은 외모에 유달리 한식을 좋아하는 고 은을 신기해하곤 한다. 이사와의 식사라 한식당을 기대했던 터라.. 한껏 무게 잡힌 분위기에 편히 먹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오늘 움직임이 많아서 그런지 남기진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왠지 가라앉은 기분에 돌아가기가 싫었다. 씻고 나서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도 가득했지만, 한국에 돌아온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뒤늦게 찾아온 향수에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괜히 왔나 싶은 감정에 축 가라앉았다. 이런 기분으로 집에 들어간다면 오늘 밤은 정처 없이 유영하고 말겠지.


길가에 보이는 카페 하나를 발견해 무작정 들어갔다.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는 카페는 통유리창으로 내부의 세련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크림 브륄레, 피칸파이 한 개씩을 주문해 1층 창가에 자릴 잡았다.

샷을 내리고 있는 노란 커프 소매가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사장님을 보면, 이 카페의 인테리어는 사장님의 센스로 만들어진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노란색과 회색을 적절히 조화하면서도 선반을 원목을 이용하여 준 포인트를 보면 전공자일지도 모른 간 생각을 했다. 어쩌면 타고났을 지도. 자리에 앉아 매장을 둘러볼수록 작은 소품들도 하나하나 마음에 들어왔다. 눈에 보이는 곳으로 바로 들어왔는데 이렇게 좋은 곳을 발견할 줄이야. 오늘의 운은 이곳을 찾는데 쓸려고 아껴놨던 건가. 금방 나온 크림 브륄레의 설탕은 스푼으로 툭툭 툭 치니 금방 깨졌고, 한 입 먹으니 고소하고 달달했다. 오늘 하루의 피로가 절로 풀리는 맛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래도 한국에 오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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