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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Jul 29. 2021

태엽

아주 오래오래, 천천히



  지난여름, 폭염주의보와 경보 문자가 쏟아지던 그때에 정말 신기하게도 소름이 돋았던 하루가 있었다. 왠지 그 이율 알 것만 같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어 인정하긴 싫어 뇌에서 내려오던 생각들을 다시 꾹꾹 밀어 올렸다. 지금은 온기가 식어버린, 따스함을 가졌던 물건들. 이젠 자상하게 관리해주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물건들 위엔 얕은 먼지들이 쌓여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이곳은 옛 기억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조금 작아진 듯했다. 아니, 사실은 내가 커진 거겠지. 좀만 더 컸더라면 천장에 머리가 닿았을 수도 있을 듯한데, 나는 이곳의 천장이 그 어떤 곳보다 높아 보였고, 마당을 바라보는 저 마루 위에 달린 풍등이 바람에 울릴 때, 나도 머리칼을 날리며 함께 바람의 세기를, 향기를 느꼈다.


  시대가 변하며 여러 물건을 하나의 기기로 축약하는 사회에 반해, 제각기 물건들의 고유 특성을 알던 사람. 천천히의 미덕을 알던 분, 사람, 동물, 식물, 그 무엇도 비교하지 않고 온정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법을 가르쳐준 이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며 훌훌 날려버렸다.


  나에게 남겨주신 이 집, 물건, 도대체 당신은 제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건가요. 나는 당신의 방, 가장 안쪽에 있는 손때가 짙은 어두운 원목으로 만든 서랍의 첫 번째 칸을 열어 오르골을 꺼내었습니다. 오르골은 투박하고 그 흔한 인형, 보석도 없었으며, 손바닥보다 조금 작았지만, 이 오르골 연주는 제게 어느 연주가가 연주하는 음악보다 감미로웠지요. 나는 태엽을 천천히,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감았습니다. 그때와 다름없는 음악소리에 이제껏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흐릅니다. 만약 당신이 살아계시다면 당장이라도 뛰어가 소매를 붙잡고선 매달리고 싶은데, 지난 간 보지 못한 당신을 보고 싶었다고, 그리워했다고, 당신과 함께했던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지금 이 세계에선 할 수 없을 테니, 당신을 만나 그 이야길 할 날이 오려면 아무래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야 하겠네요. 그때까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당신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저는 약하지만은 않답니다. 어느 날은 당신을 그리워하며 조금 더 슬퍼하고, 다음 날은 씩씩하게 일어나 걸어갈 테니까요. 


  저의 가족이자, 스승이자, 친구였던 할머니께. 그동안 부끄러워 사랑한단 말을 많이 못한 것이 못내 큰 아쉬움으로 가득합니다. 다시 만날 그 순간을 기다리며, 그때는 제가 살아온 나날들을, 생각하던 것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할 테니 꼭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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