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해피 썬데이!
꽃과 나무와 아이는 햇살을 받고 자란다.
어릴 적,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다. 나무 몇 그루와 맨드라미, 봉선화 같은 꽃과 채소를 심어 놓았다. 철마다 꽃이 피고 토마토와 오이가 열리고 아주 가끔은 수박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구기자나무다. 구기자나무 덩굴이 담벼락을 타고 길게 늘어지고 주홍빛 열매가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렸다. 엄마는 일요일마다 아버지가 마실 구기자차를 끓인다며 언니와 내게 한 소쿠리씩의 할당량을 주시곤 했다. 귀찮은 마음에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어느새 언니와 함께 구기자 열매를 따다 보면 마치 주홍빛 보석을 주워 담는 것 같았다.
햇살이 잘 드는 담벼락에 무르익은 구기자는 빛이 영롱했다. 손으로 톡 터트려 입에 넣곤, 웩 하고 도로 뱉어내곤 했다. 보기랑 다르게 맛이 아주 형편없었다. 어느새 무상무념으로 구기자를 따다 보면 한 소쿠리가 가득 채워졌다. 가득 찬 소쿠리를 건네며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일조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자랐다.
일요일 아침이면 엄마는 장롱 속 이불을 모조리 꺼내 빨랫줄에다 널었다. 빨랫줄도 모자라 마당 한가운데 솜씨 좋은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두신 널따란 평상에도 이불과 요를 널었다. 빨랫줄에 이불을 널고 양 끝을 마주해 커다란 집게를 꽂아 두었다.
동생과 빨랫줄에 널려있는 이불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숨바꼭질 놀이도 하고 잡기 놀이도 했다. 그러다 엄마에게 이불 떨어진다며 잔소리를 듣곤 했다. 두꺼운 솜이불 사이에 숨어 있으면 눈앞이 온통 깜깜했다. 이불 속 암흑세상 저 멀리서 빛이 새어 들어온다.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마치 노란 초승달 같았다. 이불 속은 밤하늘에 뜬 달을 품은 듯 포근했다. 달을 잡으러 서서히 이불 끝을 향해 걸어 나가면 빨래집게가 툭 하고 떨어져 엄청난 양의 빛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덮쳤다. 마침내 눈부신 달이 아닌 태양과 마주한다. 천사의 아우라 같은 눈부신 황홀함과 동시에 엄마의 잔소리가 어김없이 날아와 꽂혔다. 여섯, 일곱 살 무렵 기억을 떠올리면 늘 이 풍경이 평온하게 펼쳐진다.
동생과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룻강아지처럼 햇살 가득 찬 마당을 마구 휘젓고 다녔다. 평상 위에 포개어져 있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있으면 볕을 가득 품은 이불 속은 따스하다 못해 찜통 같았지만, 땀이 줄줄 흐를 때까지 참고 있었다. 동생과 누가 더 오래 이불 속에서 버티나 내기를 하는 것이다. 덥고 답답했지만 참 평온했다. 어쩌면 엄마의 뱃속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햇볕 가득 받은 이불의 따스한 냄새도 좋았다. 그러다 이불을 돌돌 감은 채로 땅바닥에 툭 넘어지기도 했다. 이번엔 진짜로 혼이 날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엄마는 해님처럼 늘 따뜻했다. 단 한 번도 크게 화를 내지 않았다. 잔소리는 종종 하셨지만, 매를 들거나 순간적으로 버럭 했던 기억은 없다. 나도 엄마가 되고 보니 가장 존경스럽고 본받고 싶은 부분이다.
해님이 빨랫줄에 걸터앉은 일요일, 마당에서 이불 소독이 끝나면 엄마는 도넛을 만들어주었다. 밀가루 반죽을 기다랗게 꼬아서 꽈배기도 만들어주셨고 직접 만들어 보라며 주전자 뚜껑처럼 생긴 틀을 주기도 하셨다. 반죽을 밀어 틀을 꾹 눌러 빼면 동그란 고리 모양의 반죽이 만들어졌다. 끓는 튀김 냄비에 풍덩 넣고 반죽이 노랗게 보글보글 끓다가 동동 떠오르면 건져낸다. 신문지에 올려 기름을 빼고 설탕을 이리저리 둥글려 입혀 먹으면 쫄깃하고 달달한 맛이 일품이었다.
내게 어린 시절 일요일은 정말‘오, 해피 선데이’그 자체였다. 마당에 가득 내려앉은 햇살이 집안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온 집안을 채우니 참으로 따스하고 행복했다.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나만의 마당이요, 유년의 케렌시아이다.
남편과 나는 일요일이면 개인적인 약속을 잡지 않고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노력한다. 특별하거나 좋은 곳에 가는 건 아니지만,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나의 유년처럼 아이들도 햇살을 가득 받아 온기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서다. 아이들을 데리고 해가 잘 드는 곳에 앉아 책 한 권을 이불 삼아 덮고 어린 시절 이불 어둠 속 노란 달을 떠올린다.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햇살이 부서져 덮이는 듯 따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