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만찬처럼, 우리였던 시간들

사랑은 때때로 복잡한 감정의 조합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by 진하준

사랑은 때때로 복잡한 감정의 조합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특히 관계가 끝나기 직전의 그 순간들—정확히는 서로의 온기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는 시점에서우리는 더욱 선명하게 상대와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되짚어보게 된다.



사랑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든, 이미 과거로 흘러가 버린 것이든, 결국 우리 가슴속에 남는 건 언어보다 감정이고, 구체적 기억보다 희미한 감각이다.

서로가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남긴 감정의 흔적들, 그것이 진짜 이별 후에 남는 유산일지 모른다.


사랑은 늘 기대와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요동치는 감정이다.

우리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고, 그 애씀 속에서 종종 상처를 주고받는다.

사랑이 처음 시작될 땐 몰랐다.


나의 투박한 말투 하나,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너에게 상처가 될 줄은. 그리고 그 상처가 언젠가는 내게 돌아와 날 찌를 거라는 것도. 사랑은 따뜻하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면도 숨겨져 있다.

그 복합적인 얼굴을 마주할 때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게 된다.


그날 너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만하자." 그 짧은 말 한 마디는 마치 세상의 모든 문이 한꺼번에 닫히는 소리 같았고, 내 가슴 깊은 곳을 내려앉게 했다.

함께 쌓아온 수많은 대화, 웃음, 눈물, 그리고 온갖 사소한 기억들까지도 그 단어 하나에 의해 허물어졌다.

말 대신 흘러내리던 너의 눈물은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품고 있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은 그 순간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대화였다.



이별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유를 찾으려 한다.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균열이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결국 어느 시점에서 서로를 놓아버렸는지를 그러나 질문을 반복할수록 마음속에 쌓이는 건 명확한 해답이 아니라 흐릿한 슬픔과 지독한 허무함뿐이다. 해답은 없고, 감정만 남는다.


나는 회피했고, 너는 침묵했다. 대화가 줄어든 만큼 마음의 거리도 벌어졌고, 우리는 어느새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말았다. 사랑은 말로 이어진 다리였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다리를 놓아버렸다.


각자의 섬에서 외롭게 서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내 감정만 옳다고 믿었고, 너 역시 너의 감정에 충실했기에 우리는 끝내 맞닿지 못했다.

우리는 다정함 대신 오해를, 기대 대신 실망을 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을 '만찬'이라 부르고 싶다.

찬란했던 순간들, 때로는 씁쓸하게 입가를 맴돌던 아쉬움들, 그리고 조용히 나눴던 따뜻한 감정들까지. 모든 기억은 하나의 정찬처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우리가 나눈 말들은 와인잔의 반짝임 같았고, 때로는 미지근한 수프처럼 허전하기도 했다.

그 속엔 사랑의 온도와 농도가 담겨 있었다.

그 감정들은 때로 삼키기엔 아깝고, 또 너무 뜨거워 쉽게 삼킬 수도 없는 맛이었다. 사

랑은 단순히 달콤한 것이 아닌, 때때로 짠맛과 씁쓸함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미였다.



이별 후 나는 너의 흔적을 정리하려 애썼다. 휴대폰 속 사진을 지우고, 매일같이 나눴던 메시지를 삭제하고, 네가 자주 가던 거리를 의도적으로 피해서 걸었다.


그러나 애쓸수록 역설적으로 너는 내 일상에 더 깊이 스며들었다.

네가 쓰던 말투는 내 일상 언어가 되었고, 네가 좋아하던 음악은 여전히 재생목록에 남아 있었다.

문득문득, 네가 웃던 얼굴이 꿈속에 나타났고, 어떤 날은 너와 닮은 뒷모습을 보곤 발걸음을 멈췄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함께했던 장면들이 떠올랐고, 새로운 공간에서도 자꾸 네 흔적을 찾게 되었다.


나는 문득 알게 되었다. 내가 바랐던 사랑의 증거란, 너와 함께 있는 그 '순간' 그 자체였다는 걸.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고, 그 다름은 때때로 오해와 거리감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서툴렀지만 진심이었다. 쉽게 표현하진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언제나 너를 향해 있었다. 우리가 부딪히고 상처를 주었던 그 다툼들조차, 결국 서로를 놓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특별했다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의 계절처럼 서로에게 머물렀다. 그 시간이 길지 않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그 어떤 사랑보다 진실하고 선명했다.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에는 우리가 미처 건너지 못한 다리가 놓여 있고, 나는 그 다리 위에서 여전히 너를 그리워한다. 그리움은 조용히 스며드는 감정이다.

외로움보다 덜 아프지만, 더 오래 남는다. 그렇게 너는 여전히 나의 하루 속에 스며들어 있다.


마지막 순간, 너는 말했다. "우리의 이별, 만찬 같았으면 좋겠어. 짧지만 오래 남는." 나는 그 말이 이별의 미화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마지막 애정이라는 걸 천천히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한 작별이 아닌, 함께했던 챕터의 마지막 페이지를 정성껏 넘기는 행위였다.

그 말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따뜻하게 남아, 어떤 밤엔 조용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고통이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과 기억은 여전히 아름답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혹은 내 마음 속에서 저녁노을처럼 은은히 피어오르길 바란다. 그날의 만찬처럼, 우리가 함께한 그 모든 순간은 분명 찬란했다.

지금도 내 안에는 작지만 환한 등불처럼 남아 있다.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게 되더라도, 나는 이 기억을 소중히 품을 것이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결을 조금 더 깊고 넓게 만들어 주는, 조용한 잔향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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