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계절을 걷다
첫사랑은 계절을 닮아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찾아오고, 피어나는 것도, 시드는 것도 모호하다.
다만,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때가 봄이었다는 것을,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에게 첫사랑은 그렇게 찾아왔다. 스며들듯이, 조용하게.
고등학교 2학년, 햇살이 들던 복도 끝에서 네가 처음 웃었던 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교실 창문에 비친 너의 얼굴은 환했고, 그 웃음은 묘하게 내 마음을 건드렸다. 처음엔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조금 더 눈이 가고, 조금 더 말을 걸고 싶어지고, 네가 내게 말을 걸어오면 괜히 어색하게 굴던 나.
그 모든 게 그때는 사랑인 줄 몰랐다.
네가 나를 향해 걸어올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건 마치 시험지를 뒤집는 순간의 긴장감 같았다.
혹시 들킬까봐, 혹시 어색해질까봐 숨기고 또 숨겼던 마음.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래서 더 애틋했다.
친구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친한 친구처럼 굴었지만, 네가 웃으면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고, 네가 울면 괜히 마음이 아팠다.
네가 좋아한다던 노래를 집에 와서 수없이 들었고, 네가 언뜻 말한 영화는 혼자 조용히 봤다.
시험기간엔 너의 손글씨로 정리한 요점을 빌려 보면서, 괜히 더 집중하려 애썼다.
그렇게 나는 너를 천천히, 조용히 사랑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고, 혼자 간직하는 마음이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 네가 내게 말했다. "같이 벚꽃 보러 갈래?" 순간 모든 공기가 멈춘 것 같았다. 벚꽃. 함께 걷는 봄길. 그 짧은 말 속에 나는 무수한 상상을 그렸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봄날의 길을 함께 걸었다.
떨어지는 꽃잎 사이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걷기만 했다.
그런데 그 침묵조차 따뜻했다. 그날, 나는 바랐다. 이 계절이 끝나지 않기를.
하지만 계절은 머물러주지 않는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너는 전학을 가게 됐고, 우리는 어색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연락할게." 네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안다. 그런 말은 대체로 지켜지지 않는다.
아니, 지켜지기 어렵다. 그리고 역시나 너는 연락하지 않았고, 나도 그 사실에 익숙해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익숙해졌다고 해서 사라진 건 아니었다. 마음속의 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대학에 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몇 번의 연애도 있었지만, 문득문득 나는 다시 네 생각을 했다.
바람이 부는 날, 벚꽃이 피는 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웃으며 지나가는 풍경.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너를 데려왔다.
그렇게 너는 나의 과거 속에서, 그러나 지금처럼 생생하게 존재했다.
어느 날, 정말 우연히 너의 소식을 들었다. 친구의 SNS를 통해, 너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변한 것도 있었고,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여전히 웃을 때는 입꼬리가 먼저 올라가고, 눈이 반달처럼 접히는 너.
그 사진을 보고 나는,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감정이 복잡했다.
그리움과 반가움, 그리고 어쩌면 아주 조금의 미련까지.
첫사랑은 그렇게, 나를 다시 어린 시절로 데려갔다.
철없던, 그러나 진심이었던 그 시절로. 나는 너에게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너와 함께 걸었던 그 봄날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시절의 나를 대신해서.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좀 더 용기 있게 너에게 다가갔을까.
아니면, 여전히 망설이며 멀찍이에서 너를 바라봤을까. 답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너를 좋아했던 그 시절의 나는, 어떤 말보다도 진심이었다는 것.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너를 떠올렸다.
비교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첫사랑은 어쩌면 모든 사랑의 기준이 되었던 것 같다.
너처럼 웃는 사람을 보면 자꾸만 눈이 가고, 너처럼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잠시 멈칫하게 된다.
네가 내게 남긴 건 추억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계절의 어느 날, 나는 다시 벚꽃길을 걸었다.
그 길은 예전과는 조금 달랐고, 함께 걷는 사람도 너는 아니었지만, 마음 한편에서 조용히 너를 떠올렸다.
그리운 계절, 그리운 사람, 그리운 감정. 나는 여전히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그저, 마음속에 조용히 자리를 바꿔 앉을 뿐이다.
어떤 날은 선명하게 떠오르고, 어떤 날은 흐릿하게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완전히 잊히는 법은 없다.
그것이 첫사랑의 본질이다.
끝나지 않았기에, 그리고 다시 시작되지 않기에,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네가 내게 처음이었고, 그래서 특별했으며, 그래서 오래도록 남았다고.
내 첫사랑, 그 계절을 걸었던 너에게. 고맙고, 미안하고, 여전히 그립다고. 그렇게 나는 오늘도, 지나간 봄날을 마음속에서 다시 걷는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날의 너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우리의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모든 감정이 헛되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시절의 내가 사랑을 어떻게 느꼈고, 얼마나 소중히 간직했는지를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가끔은 상상해 본다. 우리가 같은 도시에 살았다면, 혹은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마주쳤다면 어땠을까. 영화처럼 다시 만나는 장면을 꿈꾸기도 했고, 벚꽃이 흩날리는 날, 어느 골목 어귀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고, 우리의 이야기는 멈춘 채 각자의 계절 속으로 흘러갔다.
그래도 나는 그 시간들이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그 마음이 진짜였기에, 상처로 남기보다 빛나는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 자체로 소중하다.
설레임, 떨림, 조심스러움, 그리고 가끔은 아련한 후회까지. 그런 감정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를, 그런 감정을 사랑한다.
사랑은 늘 그렇다. 시작보다 끝이 더 오래 남고, 함께한 날보다 마음속에 남은 감정이 더 깊다.
너와 함께한 날들은 짧았지만, 그보다 긴 시간을 너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너를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글쎄, 그건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것이다. 반갑게, 그리고 담담하게. 그리고 말할 것이다. "네 덕분에, 나는 사랑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어."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 창밖에는 봄비가 내린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 너머로, 그날의 벚꽃이 떠오른다. 우산을 나란히 쓰고 걷던 그 길, 말없이 웃던 너의 얼굴. 모든 것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다.
첫사랑은 그렇게 다시 찾아온다.
비 오는 오후, 잊고 있던 노래, 오래된 사진 한 장처럼. 불쑥 찾아와 마음을 흔들고는 다시 조용히 물러간다. 나는 그 감정의 파도를 조용히 받아들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고맙다, 그때의 너. 그리고 그 시절의 나. 비록 말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을 통해, 조용히 너에게 닿기를 바란다.
첫사랑, 그 계절을 걸었던 너에게. 그 시절을 사랑했던 나에게.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첫사랑에게. 우리는 모두 그런 계절을 지나왔다. 어떤 이는 아직도 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계절을 기억하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나간 봄날을. 그리고 언젠가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기를. "안녕, 내 첫사랑.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