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너를 좋아한 날의 풍경

내 마음이 나보다 먼저 걸어간 그 날

by 진하준

언제였을까. 네가 내 마음속에 들어온 정확한 시점을 나는 모른다. 사랑이라는 건 대개 그렇다.

시작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 돌이켜보면 이미 걷고 있는 길 위에 서 있다는 걸 깨닫는다.

마치 낯선 여행지에 있다가 문득, 그곳이 익숙하게 느껴질 때처럼


그날도 특별할 건 없었다. 늘 그렇듯 늦은 오후의 하늘은 어정쩡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커피는 조금 식어 있었고, 네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네가 웃을 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설레는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닌, 이상한 감각. 지금 와서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의 입구였다.


그때부터 내 일상은 조금씩 바뀌었다. 네가 좋아한다던 노래를 무의식중에 흥얼거리고 있었고, 네가 말한 책을 도서관에서 찾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가끔은 네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으며, 숨겨진 의미가 있을까 자꾸만 해석하려 들기도 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기쁨이었고, 동시에 작은 고통이기도 했다. 마음은 늘 앞서갔고, 나는 늘 머뭇거렸다.


너와의 시간은 특별한 이벤트 없이도 충분히 특별했다.

함께 걷던 평범한 골목, 비 오는 날 함께 맞은 우산 하나, 네가 웃으며 건네준 말 한마디. 사소한 것들이 내 안에서 커다란 기억이 되었다. 어떤 하루는 네 얼굴 하나만으로 완성되었고, 어떤 하루는 너의 말 한 줄로 무너졌다. 그 감정의 진폭은 알 수 없을 만큼 컸고, 나는 그 안에서 매일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바랐다.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이길. 네가 가끔 내 눈을 오래 바라보는 그 순간들이, 나와 같았으면 했다. 하지만 사랑은 늘 조심스럽고, 나는 말보다 눈치를 먼저 살폈다.

혹여 너의 평온한 일상에 내가 균열을 낼까, 감정을 감추고 웃는 법을 배웠다. 내 마음을 너에게 들키는 것보다, 너를 잃는 것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너를 좋아하면서 나는 나를 더 많이 돌아봤다. 어떻게 웃고 있는지, 어떤 말투로 너를 대하고 있는지,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 너 앞에서의 나는 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너의 하루에 방해가 되기보다는, 작은 위로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너를 향한 마음은 내 안에서 자라고 또 자랐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감정은 그냥 스쳐가는 관심이 아니라, 오래 머물 감정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 망설여졌다.

오래 머무는 마음일수록 더 조심스러워지고, 소중한 만큼 더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조심히 너를 바라보았고, 네가 웃는 순간마다 마음속에 작은 별 하나를 새겼다.

언젠가 그 별들이 가득 차면, 용기 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매일을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네가 물었다.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해?"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너는 눈치 챘을까. 내 마음을. 아니면 그냥 평소처럼 무심한 질문이었을까.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냥 요즘 좀 바빠서." 하지만 그 말의 속뜻은, "너를 너무 좋아해서."였다.


우리는 종종 말하지 못한 것들 때문에 멀어진다. 그날 내가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그때의 너도 나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랑에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맞지 않으면 아무리 큰 마음도, 아무리 깊은 진심도 어긋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어긋남마저도 아프지 않았다.

너를 좋아했던 시간은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고,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그 자체로 충분했다.

꼭 결실을 맺지 않아도, 반드시 이어지지 않아도, 사랑은 사랑이었다. 나는 그것을 너를 통해 배웠다.


지금도 가끔 너를 떠올린다. 너와 나란히 앉아 마시던 식어가는 커피, 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거리의 풍경, 네가 좋아하던 노래 한 구절. 그 모든 것이 지금도 내 일상에 남아 있다.


너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따뜻해지고, 동시에 쓸쓸해진다. 그 감정은 아프지 않다. 오히려 감사하다. 네가 내 인생에 스쳐가 준 것이.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사랑은 반드시 닿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란 걸.

꼭 이어져야만 의미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랑이란, 누군가를 온전히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 사람의 행복을 조용히 바라는 감정이라는 걸.

너를 좋아했던 시간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고,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그래서 이 글은 고백이 아니라, 기록이다.

처음 너를 좋아하게 되었던 그 순간, 그 풍경, 그 감정의 결을 남기고 싶었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흘러 이 마음이 흐릿해질 때, 다시 꺼내 읽으며 내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기억하고 싶다. 사랑은 언제나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고, 조용히 자란다.


언제였을까.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너를 좋아하게 되었던 그날의 하늘은 분명히 맑았다.


햇살은 따뜻했고, 바람은 조용했으며, 너는 내 옆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너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것이, 내가 너를 좋아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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