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진짜 좋은 친구야
나는 긴 시간 동안 너의 곁에 있었다.
처음부터 의도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편했다. 너라는 사람이.
같이 걷고, 웃고, 이야기하고, 아무렇지 않게 밤을 새워도 어색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사람.
너도 그랬을까.
우린 언제부터 친구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그냥 친구’로 불리는 관계가 되었고, 나는 그 말에 괜히 웃음이 났다.
그러다 어느 날, 그 ‘그냥’이라는 말이 나를 조금씩 아프게 하기 시작했다.
네가 힘들다고 했을 때, 누군가에게 상처받았다고 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네 옆에 앉아 있었다.
괜히 화가 났다.
왜 그런 사람을 좋아하느냐고,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관계에서 빠져나오지 않느냐고.
그 말들을 꾹꾹 눌러 삼켰다.
그 순간 나보다 더 미운 건, 결국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척하는 내 자신이었다.
“넌 진짜 좋은 친구야.”
그 말이 처음엔 고마웠다.
나를 믿는 사람,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증거 같았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은 마치 벽이 되었다.
“좋은 친구니까 여기까지만.”
그 이상은 아니야, 라고 내가 널 좋아하게 된 건 어느 한순간의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서서히, 아주 천천히 스며들었다.
너의 말투, 너의 습관, 너의 웃음, 너의 무심한 다정함.
모두가 이유였고, 동시에 모두가 핑계였다.
내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네가 다른 사람을 이야기할 때, 질투하지 않으려 애썼고, 무심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한 내가 비겁했다.
그리고 무서웠다.
너를 잃을까 봐.
‘고백’이라는 말은 간단하지만, 그 말이 가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친구로라도 곁에 있고 싶은 마음과 연인으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나는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언젠가 네가 말했다.
“난 너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
그 말은 나를 무너뜨렸다.
편하다는 말은 좋지만, 편해서 연인이 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네가 아닌, 내 안의 환상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들어낸 ‘우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 상상 속에서만 우리는 가까웠다.
그래서 점점 조용해졌다.
연락을 조금씩 줄였고, 약속을 일부러 피했고, 너의 소식에도 덜 반응하려 애썼다.
너는 그 변화를 눈치챘을까.
아니, 눈치채지 않았기를 바랐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끌리는 감정 이상의 것.
그 사람이 웃는 게 보고 싶고,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고, 내가 그 행복 안에 조금만 섞일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그게 짝사랑이었다.
너에게 그 마음을 전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 건, ‘우리의 거리’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거리,
비록 연인은 아니지만 친구로라도 숨 쉴 수 있는 이 공간.
그걸 깨뜨리기 싫었다.
그리고 그건 너를 위함이기도 했지만,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잃을 용기’가 없었다.
무너지기 싫었고,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말에 상처받을 자신이 없었다.
가끔 상상해본다.
어떤 평행우주에서는 내가 용기내어 말하고, 너는 내 손을 잡아주고,
우리는 연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상은 언제나 짧게 끝난다.
그리고 현실이 찾아온다.
너는 나에게 웃으며 말한다.
“우리 오랜 친구잖아.”
그래, 우리는 오랜 친구였다.
그 말이 나를 울리는 건, 그 오랜 시간이 나에게는 사랑이었고, 너에게는 편안한 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쯤은 묻고 싶었다.
넌 정말 몰랐을까.
내가 왜 너의 전화를 가장 먼저 받고, 왜 너의 SNS 글에 늘 먼저 댓글을 달고, 왜 너의 말 한 마디에 하루 기분이 바뀌었는지를.
하지만 이젠 묻지 않기로 했다.
너의 무심함이 너의 상처를 지키는 방식이라면, 그걸 이해해주는 것도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언젠가 너에게 누군가 생기겠지.
그리고 나는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겠지.
그가 너를 웃게 하고, 너를 사랑하고, 너의 하루가 되는 걸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뒤돌아서겠지.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 마음을 조금씩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어느 한 쪽이 더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면 그건 어딘가에서 멈춰야 할 순간이라는 걸.
내가 너를 멀리한 건,네가 나를 멀리한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았으면 좋겠다.
네가 변한 게 아니라,내 감정이 달라졌기 때문에지켜야 할 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걸.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하지만 그 좋아함을 멈추려면수천 가지의 이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유 중 가장 결정적인 건,'이제 그만 놓아야겠다'는 스스로의 결심이다.
나는 네가 더 이상 나의 중심이 되지 않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하루를 시작할 때 네 소식을 먼저 확인하지 않기를,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듣지 않기를,
너의 기분에 따라 내 하루가 좌우되지 않기를.
그건 쉽지 않았다.
오랜 습관을 버리는 일이었고,오랜 애정을 정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너와 찍은 사진들을 폴더 안에서 하나둘 지우기 시작했다.
그 장면들이 사라진다고 해서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행위가 주는 상징은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주었다.
우리는 어쩌면 끝나지 않을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았기에,확실하게 정리하지 않았기에.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때로는 어떤 관계는'좋은 친구였어'라는 말로 끝나는 게가장 온전한 마무리라는 것을.
비록 그 마음이 닿지 않았고,나 혼자만의 이야기였을지라도,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본 기억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이었기에더 소중했다.
더 아팠고, 더 깊었다.
지금의 나는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문득 연락하지도,기억을 되짚지도 않는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너는 여전히 살아 있다.
말없이, 조용히.그게 짝사랑이 남기는 방식이다.
묻어두고, 흘려보내고,그러면서도 잊지 못하는 것.
나는 너를 통해 사랑을 배웠고,아픔을 견디는 법도 배웠고,이름 없이도 진심을 품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그래서, 고맙다.
끝내 너의 곁에 연인으로 서지 못했지만한때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나를이제는 조금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 기억은,내가 혼자서 지켜낸가장 조용하고 따뜻했던 계절이었다.
그리고 그 계절은언제까지고 내 안에 머무를 것이다.
조용히 피었다가,조용히 사라지는 사랑.
그러나 절대 가볍지 않은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