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
어릴 적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빠는 늘 무뚝뚝하고, 말수가 없고,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 엄마는 가까운 존재였다.
밥을 해주고, 안아주고, 나의 기분을 먼저 살피던 사람.
반면 아빠는 늘 집에 없었고, 있어도 피곤해 보였으며, 말보다는 한숨이 많았다.
그런 아빠가 왜 그렇게 날 사랑했는지, 왜 그렇게 무너져 가면서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출근을 반복했는지를, 나는 한참을 살아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기억나는 사진이 몇 장 있다.
하나는 바닷가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아빠는 그 옆에서 한쪽 팔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햇빛에 눈이 부셔 찡그린 내 얼굴, 그리고 그날의 바람과 바다의 냄새까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또 하나는 아빠와 내가 둘이 앉아 있는 사진이다.
어릴 적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아빠는 무척 젊고도 고단해 보였다.
내게 웃어주지만, 그 미소 뒤로 무언가 말하지 못한 감정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땐 몰랐다.
아빠가 하루하루 어떤 싸움을 하고 있었는지 회사에서는 누군가에게 머리를 숙이고, 집에서는 묵묵히 생계를 책임지며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버티고 있었다는 걸.
그는 슈퍼맨이 아니었다.
다만 슈퍼맨인 척, 아무 일도 없는 듯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이제, 그가 나를 낳았던 나이가 되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무게는 조금씩 실감하고 있다.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나며 책임이라는 단어가 어깨에 내려앉고, 숨이 차는 하루를 살다 보면, 문득 아버지라는 이름이 마음 깊이 울린다.
요즘엔 종종 거울을 보며 생각한다.
내 얼굴에 조금씩 아버지의 흔적이 스며들고 있다.
눈빛이 닮아가고, 말투가 조심스러워진다.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그도 언젠가 지금의 나처럼 망설이고, 고민하고, 외로워했겠지.
그런데 그는 그 모든 감정을 말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하루를 살았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가지는 일이기보다, 내려놓는 일에 가깝다.
그걸 나는 부모가 되지 않고도, 이제야 깨닫는다.
그가 포기했던 것들. 꿈, 취미, 친구, 잠, 그리고 침묵. 아버지는 많은 것을 내려놓으면서도 한 번도 그것을 억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인 양, 평범한 일상의 일부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가끔은 상상한다. 아버지가 지금의 나처럼 혼자 조용히 집에 돌아왔던 밤을.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공간에 들어와, 정수기 물을 따라 마시고, 발을 조심스레 벗어놓고, 소파에 몸을 기댔던 그 순간을.
그 고요한 저녁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눌러 담았던 그 시간은 얼마나 길었을까.
그의 청춘은 나를 꽃피우기 위한 거름이었고, 그의 날들은 나를 지탱해 준 그림자였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그 거름 위에 핀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다. 이제는, 당신의 삶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이제는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을 향해 말을 건넨다.
비로소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나이가 되었고,
당신이 나를 안아주던 손의 온도를 이제야 되짚을 수 있게 되었기에.
세상이 당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당신이 어떤 날들을 견디며 나를 키웠는지를 안다.
지금 내 삶이 버거울 때마다, 가끔은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답은 늘 같다.
버티고, 참고, 말없이. 그리고 다음 날도 똑같이 출근했겠지.
당신이 걸어갔던 그 길을 나는 오늘도 조심스럽게 따라 걷는다.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서 배운다.
무너져도 티 내지 않는 용기, 지쳐도 등을 돌리지 않는 책임, 그리고 말보다 더 깊은 사랑.
당신이 자주 입던 낡은 외투, 주말이면 고치던 고장 난 수도꼭지, 어디론가 다녀온 듯한 당신의 구두.
그 모든 장면들이, 이제야 진짜 아버지를 설명해주는 퍼즐처럼 다가온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
당신은 내게 늘 조용한 산 같았다.
멀리 있지만 든든한 존재, 가까이 가기 어렵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존재.
이제는 안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을 것이며, 당신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이라는 이름은, 그 모든 바람을 가슴 한쪽에 꼭 묶어두는 일이었다는 걸.
그래서 이제 나는, 그 시절 당신을 향해 늦은 인사를 보낸다.
“아버지, 당신의 삶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 무게와 고요를, 그 절제와 사랑을,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 유산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새겨지는 시간의 조각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조각들로 나라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사랑은 여전히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이 삶을 마주하고 마무리하게 될 때쯤,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그땐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아버지, 덕분에 잘 살았습니다. 당신처럼은 못됐지만, 그래도 많이 닮으려 애썼습니다.”
이제는 내가 남은 삶을 살아갈 차례입니다.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기억하며, 당신이 남긴 조용한 사랑을 나도 조심스럽게 물려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