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분노
그날 밤, 모든 게 틀어졌다. 아무 일도 없어야 했던 그 밤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우린 오랜 친구였고, 서로의 연애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였고, 때로는 연인보다 더 가까운 존재 같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에겐 남자친구가 있었다.
단단하고 오래된 관계. 내가 감히 침범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우린 선을 넘었다.
선이라는 건 원래 보이지 않지만, 넘고 나서야 얼마나 분명했는지 깨닫게 되는 거니까.
그 밤, 우리는 경계도, 망설임도, 이성도 잊고 있었다.
그건 실수였다. 아니, 어쩌면 실수라 부르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얽혀 있었다.
그녀가 먼저 내 어깨에 기대어 울었고, 나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 조용한 위로가, 그 뜨거운 숨결이, 우리 사이를 무너뜨렸다.
그건 잠깐의 위안이었고, 동시에 모든 것을 부쉈다.
우정도, 경계도, 내가 믿었던 감정의 선도. 우린 그날 밤, 침묵 속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그 정적엔 후회와 외로움과 오래 쌓인 감정이 켜켜이 얽혀 있었다.
입술이 닿을 때까지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 순간만은 우리가 허락받은 관계처럼, 거기엔 이유도 없고 정답도 없었다.
그저, 우리가 그 밤에 있었다는 것만이 진실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그녀는 조금씩 멀어졌다. 우리가 나눈 모든 것들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그녀는 평소와 똑같은 듯 행동했지만 미세한 틈은 분명했다.
문자에 답이 느려졌고, 목소리가 굳었고,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의 말투는 평소와 같았지만, 눈빛은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아무 일 없었던 듯 행동하려 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웃는 얼굴을 지어 보일 때마다, 내 안에서는 파열음이 터졌다.
“우리...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 그녀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없었던 일이란 말, 그건 너무 잔인했다. 마치 나만 그 밤에 있었고, 그녀는 없었다는 듯.
난 분명,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 내 감정 속에서, 그리고 아직 떨리는 손끝으로. 그 밤 이후,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되짚고 있었다.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녀는 무슨 감정이었는지.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내 마음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모든 건 그냥, 감정적 착오였던 것처럼.
그리고 알게 됐다. 그녀는 여전히 그 남자와 함께였다.
나와의 일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채, 그녀는 그 사람 곁에서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생각하며 밤을 새우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미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를 덮친 흔적을 벗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탈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차마 억지로 끌어낼 수도, 폭로할 수도 없었다.
내가 사랑한 건, 그런 방식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적어도 그녀 앞에서는. 하지만 그게 날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내가 입을 다문 순간부터, 그날 밤은 오롯이 내 안에만 남게 되었고, 그건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왜 나만 이렇게 망가져야 하는 걸까. 왜 그날의 모든 책임과 감정이 나만을 덮치는 걸까.
그녀는 울고 있었고, 나는 그냥 곁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 밤의 온도와 떨림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가고 있다
. 그녀는 벗어났고, 나는 붙잡힌 채 남아 있다.
딱 그만큼의 차이로 우리는 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 경계에서 계속 뒷걸음질치고 있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녀를 미워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
그저 ‘그날’이라는 무게를 혼자 짊어진 채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친구들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이 감정이 어느 날은 분노고, 어느 날은 후회다.
어떤 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루를 보내다가 문득 그녀의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숨이 막히기도 한다.
이게 사랑이었는지, 욕망이었는지 이제는 나도 헷갈린다. 분명했던 마음도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고 있다.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 게 맞는지, 아니면 단순히 취약한 순간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는지.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세상에서 제일 화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가 나를 조금씩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사랑보다 더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