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가을

by 진하준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였을까.


더위가 꺾이자마자 나는 이상하게도 네가 더 많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계절이 바뀌면 마음도 같이 움직인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내 마음은 여전히 너한테 멈춰 있는 것 같다. 새벽에 잠이 깨서 창문을 조금 열면,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커튼을 툭 건드린다.

그 바람을 맞고 있으면 네 손등이 떠오른다. 따뜻했다가 금세 식는 온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


가을은 늘 한 박자 늦게 온다. 달력은 이미 9월인데 나무는 한동안 괜찮은 척 푸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색이 바뀐다. 우리도 그랬던 것 같다. 사랑할 땐 영원할 줄 알았다. 서로가 서로의 하루를 비추는 조명 같다고, 그땐 진짜로 믿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짧아졌다. 웃음은 늦게 도착했고, 사과는 먼저 사라졌다.

네가 떠난 날을 딱 하루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 떠남이 하루에 끝난 게 아니라 며칠 동안 조금씩 진행됐기 때문일 거다. 크게 싸운 날보다, 아무 말도 안 한 날들이 더 선명하다. 그 조용한 날들.


나는 아직도 네가 좋아하던 것들을 건드린다. 가을 밤에 어울린다며 틀어주던 재즈. 얇은 니트의 까슬한 결. 편의점 문 열 때 확 퍼지는 뜨거운 커피 냄새. 별것 아닌데, 그런 것들이 갑자기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그때 우리는 정말 많이 웃었고, 정말 많이 울었다.

네 눈물이 내 어깨를 젖히던 순간마다 나는 “괜찮아”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말이 너를 붙잡는 끈이 됐으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하다. 위로인 척한 욕심이었을지도 몰라서.


사랑은 놓아주는 거라고들 하잖아. 나도 이제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근데 알아도 잘 안 된다. 놓아준다는 건 결국 남겨진 사람이 혼자 버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라서.


그리움은 계절 같아서 더 골치 아프다.

억지로 밀어내도 또 돌아온다. 숨기려 해도 티가 난다. 낙엽을 밟으면 바스락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만으로도 너 이름이 목 끝까지 올라온다. 입 밖으로는 못 내고, 속으로만 한 번 부른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아주 작게. 그러면 가슴 한쪽이 저려온다. 아픈데, 그 아픔이 이상하게 나를 살아 있게 한다.


가을빛은 예쁘면서도 좀 잔인하다.

햇살은 부드럽게 내려앉는데 그림자는 길어져서, 숨겨둔 것들을 다 꺼내 놓는다. 그 그림자 속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했는지, 얼마나 서툴렀는지 같이 본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천천히 말했을까, 더 오래 안아줬을까. 모르겠다.

같은 실수를 다른 표정으로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확실한 건 있다. 나는 아직도 네가 남아 있는 계절 안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밤이 깊어지면 바람 소리가 커진다. 그 소리를 들으면 네 목소리가 떠오른다.

조용히 낮게 말하던 목소리. 내 하루를 이상하게 환하게 만들던 목소리. 그러다 문득 묻게 된다. 우리는 어디쯤 있었을까. 우리는 행복했던 걸까. 대답은 늘 흐릿하다. 가을 하늘처럼 맑은데 손에 잡히진 않는 느낌.


며칠 전에는 집 앞 가로수 길을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목도리를 고쳐 매고 지나가고, 자전거 바퀴가 마른 잎을 밟는 소리가 났다. 나는 휴대폰을 몇 번이나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보내지 못한 문장이 화면에 남아 있었다.


‘오늘 바람이 차다. 감기 안 걸렸니.’
그 한 줄을 지우면, 네가 진짜로 끝나는 것 같아서 삭제를 못 하겠더라. 그냥 화면을 껐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네가 없는 하늘도 이렇게 맑구나. 그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더 서글퍼지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창가에 앉아 한참 아무것도 안 했다. 바람은 계속 불고, 나는 그 바람에 맞춰 숨을 천천히 골랐다. 언젠가 이 계절의 끝에서 너를 웃으면서 떠올릴 수 있을까.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가을을 핑계로 너를 조금 더 그리워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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