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걷던 봄밤-完-

by 진하준

6월의 학교는 더 이상 봄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벚꽃은 진작에 졌고, 짙어진 나무들이 하늘을 거의 다 가리고 있었다.

학생회관 앞 벤치에는 햇빛보다 그늘이 먼저 내려앉았고, 저녁이 되어도 공기에는 쉽게 식지 않는 열기가 남아 있었다. 계절은 분명 앞으로 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오래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 같았다.


서윤과 멀어진 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후회가 날이 갈수록 더 또렷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내가 화가 난 줄 알았다. 아니면 적어도 상처받았다고 믿었다.


그날 밤 내가 본 장면 하나가 너무 선명해서, 그 이후 내 모든 태도까지 정당화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남아 있는 건 분노도 상처도 아니었다. 훨씬 불편하고, 훨씬 오래 남는 감정이었다.


서윤을 떠올릴 때마다 골목의 어두운 풍경보다 먼저 그 이전의 순간들이 자꾸 따라왔다. 복사기 앞에서 웃던 얼굴, 내 이름을 처음 불러주던 목소리, 학생회관 뒤편에서 박스를 붙잡고 “다행이다” 하고 말하던 표정.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의 뒤에는 늘 같은 질문이 남았다.


나는 왜 단 한 번도 묻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확인받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믿는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끝내 그러지 못했다. 오해한 것도 내 쪽이 먼저였고, 멀어진 것도 내 쪽이 먼저였고, 설명할 기회마저 지워버린 것도 결국 나였다. 상처받은 사람처럼 굴었지만, 실은 상처를 만든 쪽에 더 가까웠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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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 중앙도서관에서 나와 정문 쪽으로 걷다가 축제 때 서윤과 함께 박스를 옮겼던 학생회관 뒤편을 지나게 됐다. 자재들은 이미 다 치워져 있었고, 바닥에는 테이프 조각 몇 개와 비에 젖었다가 마른 종이만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장소는 너무도 평범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서윤은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도와달라고 했고, 나는 같이 들었고, 그녀는 잠깐 웃었다.
그 단순한 시간을 복잡하게 만든 건 전부 내 쪽이었다.

그 순간 이상할 만큼 분명하게 알았다.


이대로 지나가게 두면, 내가 잃는 건 첫사랑만이 아니라 사람 하나를 제대로 대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기억일 거라는 걸.

그날 밤, 나는 늦게서야 서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할 말이 있어. 시간 괜찮을 때 잠깐 볼 수 있을까.

답은 한참 뒤에 왔다.

내일 저녁, 도서관 앞.

그 한 줄을 보고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이제 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하지 않는 건 더 비겁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숨기지 말아야 했다.


다음 날 저녁, 도서관 앞에는 아직 퇴관 방송이 나오기 전 특유의 느슨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계단 아래 벤치에는 학생 몇 명이 앉아 있었고, 자판기 앞에서는 동전을 세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먼저 와 있었다. 서윤은 정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녀는 예전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나를 보고도 손을 흔들지 않았고, 내 앞에 와서야 가볍게 멈췄다.

“무슨 일 있어?”

차분한 목소리였다. 다정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나는 준비해온 말들을 떠올렸지만 곧 포기했다.


다듬어 온 말들은 대부분 나를 덜 부끄럽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종류의 말이 아니었다.

“나 사과하려고 불렀어.”

서윤의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그날 축제 끝나고, 널 봤어.”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침묵이 허락처럼 느껴져 계속 말했다.

“네가 많이 취해 있었고, 어떤 남자가 너를 데리고 가는 걸 봤어. 그리고 난 거기서 멈춰버렸어.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냥 가슴이 너무 아팠고 슬펐고, 그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 장면을 보니깐 그냥... 아무 생각도 안나더라”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 이후 더 문제였던 건, 그 뒤의 내가 너무 못났다는 거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닌데도 계속 멀어졌고, 네가 물을 때마다 괜찮다고 했고, 그러면서 혼자 상처받은 사람처럼 굴었어.”

서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뒤에서 도서관 유리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잠깐 지나갔다.

나는 그 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너 좋아해...”

그 말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나왔다.


“좋아하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 말하면 끝날 것 같았고, 너가 거절할까봐 겁나서 말 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지내면 견딜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둘 다 못 하겠더라.... 좋아하면서도 제대로 좋아하지 못했고, 오해하면서도 묻지 못했어.”

나는 웃지도 못한 채 잠깐 고개를 숙였다.


“처음엔 이핑계 저핑계대면서 내 마음에서 도망쳤어, 나는... 지금 생각하면 그냥 무서웠던 것 같아.

네가 나를 별 의미 없이 생각하면 어쩌나, 내가 혼자만 너무 커진 마음을 안고 있었던 거면 어쩌나. 그걸 확인하는 게 두려워서 오히려 내가 먼저 차갑게 굴었어.”

그제야 서윤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싫어진 줄 알았어.”

그 문장은 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깊게 들어왔다.

서윤은 손에 들고 있던 책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물어봐도 말 안 해주고. 그래서 처음엔 기다렸어.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 건가, 바쁜 건가 싶어서.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계속 그러니까… 나중에는 내가 혼자만 의미를 크게 둔 건가 싶더라.”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서윤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덧붙였다.

“그게 제일 속상했어.”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정말로 미안해졌다. 그전까지의 미안함이 내 후회에 가까웠다면, 그 순간의 것은 서윤의 상처를 처음 제대로 본 데서 오는 미안함이었다.

“미안해.”

이번에는 변명 없이 말했다.

“너가 이유도 모르게 너한테 상처 준 거 알아...”

서윤이 천천히 나를 바라봤다.

“그날은.”

그녀가 입술을 한 번 적시고 말을 이었다.

“민석이랑 같은 과 애들이랑 같이 있었고, 여자애 자취방에 가서 잤어. 그런데 솔직히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 그리고 그게 우리 사이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였다.

서윤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나는 그 질문이 무엇을 묻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도 좋아해.”

한 번 숨을 고른 뒤, 더 천천히 말했다.

나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가 놓았다.

“너가 나 때문에 상처받았던 시간도 있었고, 내가 만든 거리도 있었잖아. 그래서 미안해 하지만...”

서윤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좋아해, 서윤아. 오래전부터...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한테 화가 나 있어도 괜찮고... 이제는 더 이상 내 감정과 너한테 숨고 싶지 않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말을 마치고 나니 오히려 조용해졌다. 예전처럼 심장이 터질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무섭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내 말이 내 안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덜 비겁해진 기분이 들었다.

서윤은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은 차갑다기보다 무거웠다. 한 번 멀어진 사람이 다시 가까워지기 전에 반드시 지나야 하는 시간처럼.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준아... 나도 너가 좋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서윤은 바로 웃지 않았다.

“근데...”

서윤은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처럼 바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도 좀 무서워...”


“알아.”

“또 너가 혼자 멀어질까 봐.”

그 말 앞에서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고,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만약에 그럴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내가 행동한다면, 찌찔한 새끼라고 말하면서 너가 얼굴에 주먹을 날려줘.”

서윤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웃었다.


예전처럼 환한 웃음은 아니었다. 대신 오래 망설인 끝에 아주 조금 풀리는 표정에 가까웠다.

“진짜?”

“응.”

“말 잘하네, 이제.”

나는 그제야 따라 웃었다.

“내가 처음 사랑을 해봐서 그래.”

서윤은 책을 품에 안은 채 한 발짝쯤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전처럼 자연스럽지도, 연인처럼 익숙하지도 않은 거리였다.

하지만 완전히 멀어진 사람들 사이의 거리 또한 아니었다.

“그럼.”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이번엔 천천히 하자.”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 그해 봄 전체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벚꽃이 피던 날로 되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끝난 줄 알았던 계절이 다른 모양으로 이어진다는 뜻으로.

나는 서둘러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서윤도 곧장 내게 기대오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계단 아래를 나란히 걸어 내려왔다.

도서관 앞 가로등 불빛이 길게 바닥에 번졌고, 저녁 공기에는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냄새가 조금씩 섞여 있었다.

몇 걸음쯤 걸었을 때, 서윤이 먼저 말했다.

“자판기 커피 기억나?”

나는 웃었다.


“네가 못 준 거?”

“응.”

“이번엔 내가 살게.”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거의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좋아해.”

나는 대답 대신 걸음을 조금 늦췄다.


그리고 너무 급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조심스럽지도 않게, 그녀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한때는 그 정도의 거리조차 건너는 일이 그렇게 어려웠는데, 막상 손끝이 닿는 순간에는 이상하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났다는 실감보다는, 오래 망설인 끝에 겨우 제자리를 찾은 감각에 가까웠다.


서윤은 손을 빼지 않았다. 잠깐, 아주 잠깐 멈춰 있던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움직였다.

손가락 끝이 내 손가락 끝에 가볍게 닿았고, 그 작고 조심스러운 접촉이 오히려 어떤 분명한 대답보다 더 깊게 남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였다.

금방 사라질 것 같지도, 쉽게 설명될 것 같지도 않은 온도. 그래서 나는 이 감각이 오래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우리가 싸우는 날이 오더라도, 다시 서로를 오해하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적어도 오늘의 이 온도만큼은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말이 없다고 해서 어색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고, 끝내 말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걸. 예전의 나는 그 둘을 늘 뒤섞어 놓았다. 해야 할 말은 삼킨 채 괜찮은 척했고, 굳이 품지 않아도 될 오해는 혼자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잃을 뻔하고 나서야, 사랑이란 감정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만큼이나, 묻는 일과 듣는 일, 오해하지 않으려 애쓰는 일, 두려워도 도망가지 않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을 계속 배워 가는 일이고, 동시에 그 사람 앞에 선 자기 자신까지도 다시 배워 가는 일이라는 걸, 나는 아주 늦게서야 알아가기 시작했다.


도서관 앞 가로등 불빛이 길게 바닥으로 번졌다.

여름에 가까워진 저녁 공기 사이로 나뭇잎들이 아주 조금씩 흔들렸다. 봄은 이미 많이 지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계절도 사람 마음과 비슷한 건지 몰랐다.

분명 끝난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돌아보면 다른 모양으로 조금 남아 있는 것. 그해의 봄도 그랬다. 벚꽃이 흩날리던 시간은 끝났지만, 그 계절을 통과하며 우리가 잃고 또 겨우 되찾은 것들은 어딘가에 조용히 남아 있었다.


몇 걸음쯤 더 걸었을 때, 나는 손바닥을 천천히 돌려 서윤의 손을 제대로 마주잡았다.

이번에는 손등 위에 살짝 얹는 정도가 아니었다. 서로의 손이 자연스럽게 맞물리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 사이를 채워 넣었다. 서윤은 말없이 그 움직임을 받아들였다.

잠시 뒤 그녀의 손가락도 내 손가락 사이로 깊게 들어와, 느리게 깍지가 끼워졌다. 그 작은 맞물림이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나는 그제야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고 걷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하게 믿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손을 마주잡고, 깍지를 낀 채 앞으로 걸어갔다.

누가 먼저 끌지도 않았고, 누가 뒤처지지도 않았다.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그 모습이 꼭 우리가 앞으로 배워야 할 방식 같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한 번의 고백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다음의 걸음을 어떻게 함께 내딛느냐에 더 가까운 것이라는 걸, 우리는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해 봄은 그렇게 끝났다.
완벽하게 봉합된 채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솔직해진 상태로.


내 손 안에서 서윤의 손이 조용히 온기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 온도를 느끼며, 우리가 지나온 계절보다 앞으로 함께 걸어갈 시간이 더 길기를 조용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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