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그 무렵부터는 약속을 잡는 일보다 약속이 생기는 일이 더 많아졌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만나 저녁을 먹고, 주말 오후에 잠깐 얼굴이나 보자고 했다가 해가 질 때까지 같이 걷고, 카페에서 두 시간만 있다가 일어나자고 해 놓고 결국 저녁까지 이어지는 날들.
나는 원래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답장이 늦는다고 휴대폰을 자꾸 확인하지도 않았고, 누가 오늘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먼저 연락하는 쪽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새 하루 중 몇 번쯤은 자연스럽게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일 아닌 척하면서.
수아는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것 같다가도, 가끔은 다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한 번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답장이 온 적이 있었다.
[미안해요.]
[낮잠 잤어요.]
나는 그 문장을 보고 웃었다.
[회사 안 다녀서 좋겠네요.]
곧 답장이 왔다.
[현우 씨는 회사 안 다니면 낮잠 안 자요?]
[잘 모르겠는데요.]
[잘 잘 것 같은데.]
[왜요.]
[그냥 그럴 것 같아요.]
그날 저녁에도 우리는 만났다.
비가 올 듯 말 듯한 흐린 날씨였고, 수아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먼저 나와 있었다.
카페 앞 처마 아래 서서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내가 가까이 가자 고개를 들었다.
“빨리 왔네요.”
“수아 씨가 더 빨랐잖아요.”
“저는 원래 조금 일찍 와요.”
“알아요.”
그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나서야, 내가 그 애의 습관을 이제 꽤 많이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오는 것, 카페에 가면 창가 쪽 자리를 먼저 보는 것, 메뉴를 오래 고민하는 척하면서 결국 늘 비슷한 걸 고르는 것.
햇빛을 좋아하면서도 한여름 더위는 잘 못 견디는 것까지.
수아는 내 말을 듣고 조금 웃었다.
“벌써 알아요?”
“몇 번 봤으니까요.”
“그럼 저도 하나 알아요.”
“뭔데요?”
“현우 씨는 저 만나러 오는날은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걸어요.”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게 티가 났나 싶었는데, 수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꼭 이미 알고 있던 걸 확인만 한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 비는 결국 오지 않았고, 대신 유리창 바깥으로 흐린 여름빛만 오래 걸려 있었다. 수아는 메뉴판을 펼쳐 놓고도 한참을 고민했다.
“또 어려워요?”
“네.”
“맨날 어렵다면서 결국 비슷한 거 시키잖아요.”
“그래도 고민은 해야죠.”
“왜요?”
“그래야 혹시 모를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었다.
수아는 늘 그런 식이었다. 별것 아닌 말도 그럴싸하게 만들고, 평범한 선택에도 이상하게 의미를 붙였다.
“현우 씨는요?”
“저는 원래 빨리 정해요.”
“알아요.”
“그것도 알아요?”
“네. 대신 다 정해 놓고도 남이 바꾸면 같이 바꾸는 편이잖아요.”
나는 이번엔 진짜로 놀랐다.
“그건 어떻게 알아요?”
수아는 메뉴판 위에 턱끝을 괴고 나를 봤다.
“그냥요. 몇 번 봤잖아요.”
나는 괜히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내가 수아를 보고 있는 만큼, 수아도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조금 실감났다.
혼자 먼저 좋아하게 된 사람처럼 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나만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다.
“그럼 오늘은 뭐 시킬 거예요?”
“생각보다 시원한 거.”
“그건 메뉴 이름이 아니잖아요.”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이에요.”
주문한 음료가 나올 때까지 우리는 별말 아닌 얘기들을 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 어젯밤 늦게까지 잠이 안 와서 결국 창밖만 봤다는 이야기, 지나가다 본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따라갈 뻔했다는 이야기.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잠깐 말이 끊겼을 때, 수아가 유리창 너머를 보며 말했다.
“현우 씨.”
“네.”
“우리 요즘 자주 보죠.”
나는 컵에 닿아 있던 손을 잠깐 멈췄다.
“그러네요.”
“저 별로에요?”
그 질문이 너무 뜻밖이어서 나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수아는 웃고 있지 않았다.
장난처럼 던진 말 같기도 했지만, 그 안에 아주 옅은 진심이 섞여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요.”
내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오히려… 더 보고 싶은 쪽인데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수아도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컵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한 번 문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구나.”
그 한마디를 듣고 나니 괜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더 늦기 전에 말을 이었다.
“수아 씨는요?”
수아는 잠깐 창밖을 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
“저도요.”
그날은 그 두 마디면 충분했다.
더 확실한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우리 사이의 공기는 분명히 조금 달라졌다.
마주 앉아 있어도 전보다 더 의식이 됐고, 걷다가 어깨가 스칠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수아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게 됐고, 수아가 잠깐 조용해지면 그 이유를 괜히 알고 싶어졌다.
어느 주말에는 영화를 보고 나와 늦은 저녁 거리를 걸었다.
길은 아직 열기를 조금 품고 있었고, 가게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수아는 영화 내용보다 엔딩크레딧에 흐르던 음악 얘기를 더 오래 했다.
“그 장면 좋지 않았어요?”
“어떤 장면요?”
“끝나기 직전에, 둘이 아무 말 없이 같이 앉아 있던 거요.”
“그건 되게 평범한 장면이었는데.”
“그래서 좋았어요.”
수아는 그렇게 말하며 내 옆에서 천천히 걸었다.
나는 그 옆모습을 잠깐 보다 고개를 돌렸다. 평범해서 좋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특별한 순간보다 오래 남는 순간을 더 잘 아는 사람.
신호등 앞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였다.
차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거나 건너편 불빛을 보고 있었다.
수아는 두 손으로 가방끈을 잡고 서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한 번 세게 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 앞으로 조금 흩어졌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 머리카락을 만질 뻔했다.
손끝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멈췄고, 나는 그 동작을 애써 주머니 속으로 숨겼다.
수아가 그런 나를 봤는지는 모르겠다.
대신 신호가 바뀌고 우리가 길을 건너기 시작했을 때, 수아가 아주 잠깐 내 소매 끝을 잡았다 놓았다.
사람이 많은 탓인지, 발밑이 조금 복잡해서였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접촉이 이상할 만큼 오래 남았다.
그날 집에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보다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오늘 영화보다 길 건널 때가 더 기억나요.]
보내고 나서 너무 솔직했나 싶었다.
지우기엔 이미 늦었다.
답장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도요.]
짧은 네 글자였다.
그런데 그 말 하나가, 그날 밤의 다른 모든 문장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며칠 뒤 우리는 또 만났다.
이번에는 공원이었다. 처음 만났던 곳과 비슷한 여름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벤치는 여전히 조금 뜨거웠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수아는 종이컵을 손에 쥔 채 그늘과 햇빛의 경계를 발끝으로 밟고 있었다.
“오늘도 빛 괜찮아요?”
수아가 물었다.
“네.”
“그래서 또 찍으려고요?”
“네.”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일부러 자세를 잡지 않았다. 대신 나를 향해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빛을 올려다봤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보다가 셔터를 눌렀다.
찰칵.
“잘 나왔어요?”
“아직요.”
“아직요?”
“지금 보는 중이에요.”
수아는 내 옆으로 다가와 액정을 같이 내려다봤다. 팔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익숙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날은 이상하게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수아는 사진을 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이 사진 좋네요.”
“왜요?”
“제가 조금 덜 어색해 보여서.”
“원래 어색하지 않았어요.”
“현우 씨 눈에는 맨날 그렇죠?”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액정만 내려다봤다. 사실 그 무렵부터는 사진이 잘 나왔는지보다, 그 안에 수아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도 좋았고, 어떤 빛 아래 있어도 오래 보고 싶었다.
수아는 액정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현우 씨는 자기가 먼저 좋아한 줄 알 것 같아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내가 먼저 좋아한 거.”
수아는 아주 잠깐 가만히 있었다.
바람이 조금 불어서 머리카락 끝이 흔들렸다. 나는 장난처럼 웃는 얼굴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수아는 예상보다 조용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요.”
나는 카메라를 내리고 벤치에 앉았다.
수아도 옆에 따라 앉았다. 여름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잘게 부서져 우리 발끝까지 떨어졌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는데요.”
나는 시선을 정면에 둔 채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답장 기다리게 되고, 약속 없는 날이 아쉽고, 사진 찍다가도 수아 씨 생각나고… 그런 건 보통 좋아하는 거잖아요.”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조금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햇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솔직해지는 일은 드물었다.
수아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길게 느껴져서, 나는 괜히 덧붙였다.
“부담 주려는 건 아니고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수아가 웃었다.
“알아요.”
“그러면 다행이고요.”
“근데.”
수아가 조금 몸을 돌려 나를 봤다.
“현우 씨가 그렇게 말하면 저는 어떻게 해야 돼요?”
나는 그제야 수아를 제대로 봤다.
장난기보다 망설임이 더 많은 얼굴이었다.
늘 쉽게 말을 꺼내던 사람이 드물게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농담처럼 넘기면 안 되는 순간이라는 걸.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요.”
내가 말하자 수아는 고개를 저었다.
“싫은 건 아닌데요.”
“그럼요.”
수아는 잠깐 숨을 골랐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데요.”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웃지 못했다.
너무 쉽게 믿으면 사라질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그때가 꼭 그랬다.
수아가 먼저 내 손등 위에 손가락 끝을 살짝 올렸다.
아주 가벼운 닿음이었다. 그런데도 그 짧은 온기가 손끝에서 마음까지 천천히 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정말 조심스럽게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여름 공기가 조금 스며들었고, 수아의 손은 생각보다 차갑고 가벼웠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됐다.
누가 먼저 사귀자고 정확히 말했는지는 나중에 떠올려도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날 이후로 수아를 부르는 내 목소리의 결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이 전보다 더 아쉬워졌다는 것, 그리고 하루의 끝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분명해졌다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오래도록 믿고 있었다.
내가 먼저 좋아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