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사귀고 나서도 우리 사이가 갑자기 달라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우리는 별것 아닌 이유로 만났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오래 했다.
퇴근하고 저녁을 같이 먹고, 집에 가는 길이 아쉬워서 한 정거장쯤 더 걸었다.
주말엔 카페에 앉아 두 시간만 있다가 가자고 해 놓고, 정신 차려 보면 해가 다 질 때까지 같이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그런 시간들이 더 당연해졌다는 거였다.
수아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와 있는 날이 많았고, 나는 그런 걸 알면서도 약속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나갔다.
만나면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고, 헤어질 땐 전보다 조금 더 천천히 걸었다.
잡지 않아도 될 손을 이유 없이 만지작거리다가, 결국엔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 되는 날들도 생겼다.
그 무렵의 나는 하루를 두 번 사는 기분이었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 하나, 수아를 만나는 시간 하나.
전자는 늘 비슷했고, 후자는 매번 조금씩 달랐다.
그 차이가 좋았다.
같은 카페에 가도 그날의 표정이 달랐고, 같은 길을 걸어도 수아가 멈춰 서는 곳은 늘 달랐다. 나는 점점 그 애가 멈추는 지점을 먼저 보게 됐다.
유리창에 비친 저녁빛, 횡단보도 옆 화분에 핀 작은 꽃, 골목 안쪽 오래된 간판, 비 온 다음 날 젖은 나무 냄새 같은 것들.
한 번은 주말 오후에 작은 문구점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원래는 카페를 가려던 길이었다.
그런데 수아가 유리문 너머 진열대를 보더니 갑자기 발을 멈췄다.
엽서, 볼펜, 노트, 스티커 같은 것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좁은 가게였다.
선풍기 바람이 느리게 돌고 있었고, 여름 햇빛은 유리창에 눌어붙은 채 안으로 희미하게만 들어왔다.
“잠깐만.”
수아는 내 대답도 듣기 전에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웃으면서 그 뒤를 따라갔다.
한참 동안 노트 코너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같은 크기의 노트를 몇 번이나 집었다 놓았다 하더니, 결국 크림색 표지에 아주 얇은 파란 선 하나만 들어간 작은 노트를 골랐다.
“그렇게 오래 고민할 거면 그냥 다 사.”
내가 말하자 수아가 노트를 들고 돌아봤다.
“안 돼. 이런 건 하나만 사야 해.”
“왜?”
“그래야 끝까지 쓰지.”
“끝까지 쓴 적 있어?”
잠깐 생각하는 척하더니 웃었다.
“없어.”
“그럼 이번에도 못 쓰겠네.”
“이번엔 다를 수도 있지.”
나는 노트를 한 번 내려다봤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눈에 남는 표지였다.
“뭐 쓰려고?”
수아는 손끝으로 표지를 한 번 쓸고는 대답했다.
“일기.”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그렇게 말한 뒤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덧붙였다.
“요즘은 그냥, 안 적어 두면 금방 지나갈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을 듣고 괜히 더 묻지 못했다.
별것 아닌 말처럼 들렸는데, 이상하게 가볍게 흘러가지 않았다.
수아는 원래도 지나가는 것들을 오래 붙잡는 사람이었지만, 그날의 말에는 조금 더 분명한 마음이 들어 있었다.
계산대 앞에서 수아는 노트와 함께 검은 볼펜 한 자루도 집었다.
“이왕 쓰는 거면 예쁜 펜으로 쓰지.”
내 말에 수아가 웃었다.
“예쁜 펜은 아까워서 오히려 덜 쓰게 돼.”
“그런 것도 있어?”
“응. 나는 그래.”
“너는 복잡한 것 같다가도 이상하게 단순해.”
“너가 더 그래.”
“또 그런다.”
“뭐.”
“날 다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 거.”
수아는 내 쪽을 빤히 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다는 몰라.”
“그럼?”
“계속 알아가는 중이지.”
수아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멈춰 세우는 말을 했다.
장난 같다가도, 듣고 나면 혼자 오래 생각하게 되는 말.
문구점을 나온 뒤 우리는 근처 카페로 갔다.
창가 자리는 햇빛이 너무 많이 들어서 안쪽 테이블에 앉았다.
수아는 아까 산 노트를 가방에서 꺼내 몇 번이나 펼쳤다 덮었다 했다.
“지금 써 보게?”
내가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첫 줄이 제일 어려워.”
“그럼 내가 써 줄까?”
“안 돼.”
“왜.”
“이건 내가 써야 해.”
한참 동안 빈 페이지를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첫 줄을 적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안 보는 척 메뉴판을 다시 들여다봤지만, 자꾸만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글씨를 빨리 쓰는 편은 아니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꼭 한 번 더 생각하고 적는 사람처럼 천천히 내려썼다.
“뭐라고 썼는데?”
“비밀.”
“벌써?”
“일기는 원래 좀 비밀스러워야 돼.”
“그럼 왜 쓰는 거야. 보여 주지도 않을 거면서.”
수아는 노트를 덮지 않은 채 웃었다.
“안 보여 줄 거라고는 안 했어.”
“언젠간 보여 준다는 뜻이야?”
“기분 좋으면.”
“되게 까다롭네.”
“대신 기대는 해도 돼.”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첫 줄 뭐냐고. 그 정도는 알려 줘.”
수아는 잠깐 망설이다가 노트를 조금 끌어당겼다.
“오늘부터 다시 써 보기로 했다.”
“다시?”
“예전에도 가끔 적었거든. 근데 맨날 중간에 말았어.”
“그럼 이번엔 뭐가 다른데?”
수아는 볼펜 끝으로 페이지 아래를 천천히 두드렸다.
“이번엔 처음부터 다시 쓰고 싶어.”
“뭘?”
“그냥. 내가 좋아했던 날들.”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 안에 나도 있어?”
수아는 대답 대신 웃었다. 그 웃음이 꼭 대답 같아서 나는 더 묻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수아는 정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 길게 쓰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만나기 전 잠깐이라도 메모를 하고, 집에 돌아가면 노트를 펼치는 날이 많았다. 가방 안에는 늘 그 크림색 노트가 들어 있었다.
카페에서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걸 본 적도 있었고,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휴대폰 메모장에 먼저 몇 줄 적어 두는 걸 본 적도 있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써?”
내가 묻자 수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중에 까먹기 싫어서.”
“뭘 그렇게까지.”
“사소한 거.”
수아는 정말 사소한 걸 적었다.
오늘 마신 커피가 생각보다 별로였다는 것.
골목 끝에서 본 고양이 한 마리가 유난히 느리게 걸었다는 것.
비가 오기 직전의 냄새가 좋았다는 것.
현우가 무심코 건넨 말 하나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는 것.
그 애는 그런 걸 적는다고 했다.
나는 처음엔 웃었다.
그런 걸 굳이 왜 써 두냐고 물었고, 수아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중에는 그런 게 제일 안 남거든.”
그 말이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았다.
큰 사건은 오히려 쉽게 기억에 남는다.
처음 손을 잡았던 순간이나, 처음 좋아한다고 말했던 날 같은 건 굳이 적어 두지 않아도 오래간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표정으로 웃었는지, 무슨 말을 하고 같이 웃었는지, 햇빛이 어디쯤 걸려 있었는지 같은 건 너무 사소해서 금방 흘러간다.
수아는 그걸 붙잡고 싶어 했다.
어느 날은 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웬일이야.”
“나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내 사진을 왜.”
“그냥.”
“그냥이 제일 수상해.”
수아는 내 휴대폰을 들고 있다가, 내가 웃지도 않은 얼굴로 화면을 보는 순간 셔터를 눌렀다.
“야, 지금 이상하게 나왔을 텐데.”
“아니. 괜찮아.”
“보여 줘.”
“안 돼.”
“너 아까 일기도 비밀이라며. 이것도 비밀이야?”
“응.”
“너 비밀 되게 많다.”
수아는 휴대폰을 돌려주면서 웃었다.
“나중에 알려 줄게.”
나는 그때도 별생각 없이 넘겼다. 수아가 원래 그런 식으로 말하는 애라고 생각했다.
조금 숨기고, 조금 남겨 두고, 조금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 당장 다 보여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는 사람.
우리는 그 여름 안에서 생각보다 평범하게 행복했다.
카페에서 마주 앉아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얘기했고, 저녁 강변을 걸으면서 서로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수아는 내 손을 잡은 채로 하늘을 오래 봤고, 나는 그런 수아를 가끔 사진으로 남겼다. 너
무 자주 찍는다고 투덜대면서도, 막상 보내 주면 한참 뒤에 꼭 답장을 보냈다.
[이 사진 좋다.]
왜 좋냐고 물으면 늘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 느낌이 남아 있잖아.]
수아는 사진도, 문장도, 기억도 전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보기 좋게 남는 것보다, 그날의 공기까지 같이 남는 걸 더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점점 나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이 장면을 수아는 나중에 어떻게 적을까.
오늘의 햇빛은 어떤 문장으로 남을까.
내가 한 말 중에 어떤 게 그 애 노트 한쪽에 조용히 들어가 있을까.
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의 하루에 내가 문장 하나쯤으로 남는다는 게, 생각보다 더 특별한 일이었다.
한 번은 수아가 먼저 물은 적도 있었다.
“너는 왜 사진 찍어?”
우리는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멀리서 아이들 웃는 소리가 들렸고, 매미 소리는 낮보다 한결 약해져 있었다.
“갑자기?”
“응. 그냥 궁금해서.”
나는 카메라 스트랩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며 잠깐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 그냥… 지나가는 게 아까워서 찍는 것 같아.”
“지나가는 게 아까워서.”
수아가 그 말을 천천히 따라 했다.
“그럼 나랑 비슷하네.”
“뭐가.”
“나는 써 놓고, 너는 찍어 두고.”
나는 그제야 웃었다.
“그러네.”
수아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잠깐 뒤,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럼 우리 오래 남겠다.”
수아는 내 어깨 쪽으로 기대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수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일기 쓸 거 많아.]
나는 걷다가 멈춰 서서 답장을 보냈다.
[좋은 쪽으로?]
곧장 답이 왔다.
[응.]
[생각보다 많이.]
그날 밤은 평소보다 더 늦게 잠들었다.
수아가 지금쯤 노트를 펼쳐 두고 있을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천천히 오늘을 적어 내려가는 모습.
사소한 말과 작은 표정과 잠깐 스친 손끝 같은 것들을 빼놓지 않고 붙잡아 두는 모습.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 노트가 훗날 내게 어떤 계절보다 오래 남게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