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까만 몸에 적당히 두려움을 줄 만큼 단단해 보이는 뿔, 눈과 눈 사이가 멀어서 더 무서워 보였던 어린 시절 시골집 숫염소.
농촌에 살았지만 농사를 짓지 않았던 나의 부모님께서는 염소를 기르며 생활비의 일정 부분을 충당하고 있었다.
처음 두 마리였던 염소가 새끼를 낳고 여러 마리로 늘어났다. 부모님은 풀을 뜯어다 먹이는 게 어려웠는지 맑은 날이면 염소들을 넓은 방죽으로 끌고 나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메어 놓았다.
그렇게 하면 염소들은 풀을 뜯어먹다 졸기도 하고 말뚝을 매둔 길이만큼은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다른 염소들은 온순해서 주인이 누구든 끌고 가는 대로 잘 따라다녔지만, 문제의 숫염소 한 마리는 성질이 사납고 무서워서 우리 남매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중 유독 나에게 더 포악한 성질을 부리곤 했는데, 그런 이유로 나는 마당에 혼자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했었다.옛날 화장실은 왜 그렇게도 먼 곳에 만들어 놓았는지, 거짓말 조금 보태면 자전거라도 타고 가야 할 만큼 멀었다. 염소막이 있던 곳은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쳐 가야 할 위치에 있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위협을 받곤 했다. 사나운 개는 사람을 물어서 무섭고, 염소는 뒷발질을 하거나 그 단단한 뿔로 들이받기 때문에 무섭다.
다른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면 고개를 들어 한번 보고는 다시 되새김질을 하거나 일어섰다가도 다시 앉았지만 내가 문을 열고 나가면 그 녀석은 묶어둔 줄이 풀릴 듯 야단이었다. 평소에는 염소막에 가둬두고 문을 잠가둬서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말뚝을 박고 밖에 메어두었을 때에는, 힘이 센 그 녀석이 혹시 풀려서 집으로 오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해야 했다.
실제로 풀려서 몇 번이나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래서 수시로 그 녀석이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 녀석은 눈이 마주치면 절대 눈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며,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자신도 움직여서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순한 염소들은 다들 앉아서 쉬고 있을 때에도, 뿔을 기둥에 문지르는 행동을 했는데, 내 눈에는 그 모습이 무기를 더 날카롭게 만드는 준비단계로 보였다.
어릴 적 주말에 하는 과제 같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염소들을 끌고 나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말뚝을 메어놓는 것이었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집 숫염소는 성질이 포악했기 때문에 그 녀석만은 부모님이 먼저 끌고 나가 멀찍이 말뚝을 박아 주셨다.나도 다른 염소들은 순해서 끌고 가면 끄는 대로 한꺼번에 대여섯 마리도 거뜬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사건은 꼭 부모님이(또는 보호자) 계시지 않는 그런 날에 생긴다.
문제의 그날은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아이들까지 집에 와서 놀고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던 방죽에서 놀았다. 동네 아이들도 우리 집 숫염소의 성질은 익히 알고들 있었지만, 다 같이 방심하고 놀았다. 모두가 그렇듯 일은 그런 순간에 생기는 거다.
우리들은 방죽 곳곳에 퍼져있는 꽃을 따기도 하고, 메뚜기를 잡기도 하며 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가 그걸 느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있는 힘을 다해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숫염소가 전속력을 다해 달려오고 있었으므로.
숫염소가 어찌나 빨리 쫓아오는지, 등골이 서늘한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달리면서도 뒤돌아 볼 수도 없었다. 우리들은 서로 낙오자가 생겨도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숫염소 목 줄 끝에 달린 말뚝이 가끔 돌부리에 부딪치며 속도를 조금 늦춰주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사람은 신발도 벗지 못하고 마루 위로 곧장 튀어 올라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직 집에 도착하지 못한 아이들을 향해 빨리 뛰라고 울부짖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한일전 마지막 결승골을 응원할 때의 느낌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녀석에게 잡히면 어른들 말처럼 뼈도 못 추리게 그 무서운 뿔로 들이 받힐 터였다. 구해주지도 못하는 걸 알기에 더 간절히 응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천만다행으로 모두가 숫염소보다 먼저 마루 위까지 올라오는 데 성공했다. 간발의 차이로 마당까지 달려온 숫염소는 코를 씩씩 불어대며 마당 앞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진짜 사람을 잡으러 온 염소였다.
아니, 우리가 아무리 어려도 다 사람인데, 사람을 저렇게 우습게 아는 염소라니.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마당에 아무도 내려갈 수 없었다. 우리들은 신발을 벗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방 안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잡고 서서 숫염소의 동태를 살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염소가 우리 사정을 알아줄리는 없었다. 눈을 번득이고 여전히 마당을 배회하며 한 사람만 걸려라 하는 것 같았다.물론 걸렸다가는 들이 받치고 뒷발차기 공격에 어디가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질 것이었다.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떤 순간에도 끝은 있었다.
염소는 소금을 좋아했나 보다.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부엌문 앞에는, 간수를 빼기 위해 올려둔 소금가마니가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숫염소는 그 짠맛에 현혹되어 더 이상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부러 마루위아래를 쿵쿵 소리까지 내며 재빨리 오르내렸어도 염소는 꿈쩍도 하지 않고 소금을 먹느라 우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안심된다기보다 허탈해지는 기분이라니. 떡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는 호랑이 이야기처럼 소금 주머니라도 달고 다니다가 던져줬다면 달랐을까?
그렇지만 이건 우리 집에 있던 사나운 숫염소 이야기다.
어디서든 쫓아오는 염소를 만난다면 혹시 소금이 있더라도 무조건 도망가길 권한다. 소금을 안 좋아하는 염소일 가능성이 더 크니까. 남편은 옆에서 개든, 염소든, 쫓아와서 덤비거든 기다렸다가 주먹으로 코를 빡~~때리라고 말한다. 그건 어른이라도 무모하니까 패스~할 생각이다.
오늘 글에 올린 그림은 대충 설명해 준 줄거리를 듣고, 제 친구가 그려주었네요. 전문가도 아닌데 그림 실력이 이 정도라니, 글의 느낌을 살려줘서 너무 고맙고, 그림 느낌이 참 좋아서 친구 자랑 한 줄 남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