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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냥이 Nov 09. 2023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겠어!!

나를 찾으려면? 나가야죠!!

카톡.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잔 마셔볼까 하는데 메시지 하나가 온다. 친구다. 아주 오래전 사진을 어디서 찾았는지 사진 속 우리는 예쁘게 웃고 있었다. 십 년 전이다.        


   "어려 보이네..."     


말끝이 흐린 건, 웃지 않는 내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표정이 살아 있는 친구의 앳된 얼굴은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 옆의 나는 눈이 웃지 않는다. 입 꼬리가 올라가 있는데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공허한 눈이 당시 내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행복한 척 웃고 있었지만, 실은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의 내 이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참하다' 정도일 것이다. 친구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이 분명하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 늘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나를 ‘행복한 선생님’이라 불러주던 중학생 남자아이가 있을 정도였다. 행복한 얼굴 뒤로 나는 감정을 철저히 숨겼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친구는 사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당시 친구의 눈에 비친 나는 '프랑스 여자' 같았다고 한다. 갑자기 프랑스 여자라니. 하얀 얼굴에 까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프랑스 여자'는 예뻤다고 한다. 예쁘고 슬퍼 보이는 여자였다나. 눈이 슬퍼 보인다는 말을 그 당시 들었다면 분명 울었겠지. 그즈음 친정이 어려워졌었다. 부모님은 갈 곳이 없어 우리 집에 함께 살고 계셨다. 불행은 한 번에 온다고 하던가. 아빠는 울산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 지 한 달 만에 혈액암 진단을 받으셨다. 앞이 캄캄했다.    

  

장인 장모와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먼저 제안해 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함께 가져야 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시댁 눈치를 보느라 일하며 아이 키우는 일에 힘든 내색도 못했다. 엄마는 밤새 모텔 빨래를 하며 병원비를 마련하셨고, 아침에 돌아와 아이들 밥을 챙겼다. 모두가 지쳐가던 그때에도 전남편은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서운하고 미워도 말을 삼켰다. 그래도 부모님 눈치 안주는 사람이니까.     


불행을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끔 아주 행복한 척 SNS에 사진을 올리거나, 여유 있는 척 허세를 부려서 나의 불행을 감추었는데 효과가 좋았다. 즐거운 척 늘 입 꼬리에 신경을 쓰고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는데, 눈이 웃지 않는 줄은 몰랐다.     

마흔이 넘도록 내 눈가엔 주름이 하나도 없었다. 간혹 누군가 “어떻게 주름 하나 없어요?”라고 물어오면, 자세히 보면 있다고 겸손을 떨곤 했다. 어떤 날은 진실을 살짝 알려주고 싶었는지 “잘 안 웃으면 돼요~”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다들 농담이려니 웃어넘겼다. 나도 웃었다. 


그래도 어려 보인다니 그거라도 다행이다 생각하며 아무도 몰래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 얘기를 잘하지 않았다. 다들 복 많은 행복한 여자 정도로 알고 있기에 그냥 두었다. 머 나쁠 거 없잖아.      


사진을 보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문득 거울을 보았다. 찡긋 웃어본다. 눈 옆에 주름이 잡힌다. 눈에 힘을 더 주어 주름을 만들어보았다. 크큭. 뭐 하는 짓인가 웃음이 났다. 몇 년 사이 얼굴이 달라 보인다. 이렇게 많이 웃는 사람인지 몰랐다는 친구들의 말에 더 열심히 웃는 것도 같다. 주름이 많아지고, 웃음이 많아지고, 나이도 많아졌다. 


마음이 요동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하던 일을 멈추어야 했던 마흔의 사춘기 어느 날.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참 재밌는 아이였다. 3학년 이기양은 친구들을 모아 '담다디'를 연습하고 1반부터 10반까지 돌며 공연을 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공연을 1달 동안 준비하고, 멀쩡한 탬버린을 찢는 정성을 보였다. 완벽한 무대를 위한 열정을 가졌던 그 아이를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나를 찾아야겠어!!  얘들아, 서울 갈래??


컴퓨터를 켜고, 항공권을 구매했다. 호텔을 예약하고, 학교에 제출할 가정학습 계획서를 출력했다. 내가 이렇게 빠른 사람이었나. 3일 뒤 우리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제 엄마 아빠가 살고 계시지 않는 나의 고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잃어버린 나를 반드시 찾아 돌아오겠다는 마음에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6년 동안 늘 반장이던 나는 이름 대린 '반장'으로 불렸다. '반장'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친구들이 모였다. 와. 서울은 어느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처음 서울을 떠나왔을 땐 한적한 이곳 생활이 답답해서 2달을 채우지 못하고 집에 가야 했는데, 부모님이 이사하신 이후론 10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친구들이 기억하는 나는 참 재밌는 아이였다. 뭐든 앞장서서 일을 벌이고 잘 해냈다. 아이들이 기억하는 나는 언니 같고, 누나 같았다고 한다. 친구들보다 키가 크기도 했지만, 주도적인 성격 때문이다. 결혼을 하면 이전의 삶의 모습과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성격 자체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나는 말없는 사람. 친구를 못 사귀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는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진로, 취업강의에서 삶의 방향을 찾고 일을 계획할 때 가장 첫 단계는 자기 이해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성격은 어떤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잘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삶의 방향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로라를 과목이 있던 세대도 아니고, 그쪽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본능적으로 알았거나 읽었던 책 어디엔가 있었겠지. 


나에 대해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진지하게 나를 알아보고, 내가 살아온 40년 중 가장 후회가 되는 순간부터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마음의 변화도 궁금했던 나는 상담을 공부하면서 나를 이해해 보기로 하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운동도 시작했다. 음악을 듣고 꽃을 샀다.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다시 즐기기 시작했다. 웃음이 늘었고, 줄음도 늘었고, 말도 많아졌다. 


이제 21살이 된 딸과 친구처럼 맥주도 마시고, 장도 보고 참 재밌다. 실컷 자고 일어나더니 혼자 청소를 다 했냐며 안 깨웠다고 뭐라 하는 착한 아이다. 갓난아기였을 때도 큰 산처럼 힘이 되던 아디아. 똥 싸고 잠만 자는 아기가 옆에 누워 있는 것 만으로 외로운 타지 생활이 외롭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아이들을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나 보다. 잘 왔지 진짜!!


이제 눈도 같이 웃는 나는 어느새 40의 반을 지났다. 태어난 곳에서 25년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난 이곳에서 20년을 살았다. 이제 나의 아이들과 내가 자란 그곳으로 돌아갈 꿈을 꾸며 행복한 매일을 살고 있다. 바라고 꿈꾸고 노력하며 이루어진다. 나는 다시 아이들과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나의 꿈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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