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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냥이 Nov 09. 2023

지금 일이 중요하니?

   25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다음 해 첫째 아이를 낳았다. 20대 후반기를 출산과 육아로 보내야 했다늘 일로 바빴던 엄마와 다르게 전업주부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지만 현실은 일과 육아 사이에서 동동거리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냥 딱 우리엄마였다. 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맛있는 쿠키를 기다리는 엄마가 되어 주겠다던 나의 바램은 동네 제과점이 대신했고, 20대의 나는 예상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일 년 정도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취업을 하면 가기 싫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4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했다. 워낙 어린 나이에 결혼을 선택했기에 적어도 3년 정도는 일을 할 거라 생각했지만, 갑자기 아이가 생겨 그만두어야 했다. 결혼하면 전업주부로 살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일을 그만둘 때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2년 가까이 집에 있으면서 수업 장면이 매일 생각났다. 다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큰 아이 돌잔치를 끝내놓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두 달 후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다시 일을 시작하던 첫 날의 그 떨림이 오늘도 생생하다. 일 하는 시간은 나를 ‘나’로 만들어준다. 딸, 엄마, 아내, 며느리가 아닌 그냥 나, 이기양이 되는 시간이었다. 살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15년을 일과 육아의 줄타기를 하며 지켜온 내 일이었다. 어린이집 같은 보육시설에서 종일 엄마를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갈등이 생겼다.내 아이를 방치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지나친 욕심 같았다. 그래도 포기 하지 못한 내 일은 그 자체로 ‘나’ 였다.     

 

  돌아보면 힘들 일에 닥칠 때 내가 선택하는 방어기재는 늘 ‘회피’였다.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던 나를 보며 친구들과 동료들은 의아해했지만, 나는 간절했다. 대학 생활을 억지로 이어 졸업만 겨우 하자던 생각이었고, 결혼으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문제 해결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회피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언제고 다시 그 문제와 만나야 한다.      


   내가 피했던 나의 문제는 “나는 깊이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상황에 떠밀려 살아가는 것은 진자 행복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걸 이제는 잘 안다. 일과 육아에 지쳐서라고 생각했던 늘 피곤했던 몸과 마음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바로 보아야 한다. 마흔이 되던 해, 일을 그만 둔 것은 단지 몇 년 일을 쉰다는 것 이상의 의미다. 


 일을 멈춘다는 것은 나를 멈춰 세운 것이었다. 언제까지 내 마음속 외침을 못들은 척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왔고, 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일을 멈추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내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선택을 했다. 도망가지 않았다.      


   나는 나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편안한 사람들만 만났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을 내려놓았다. 무엇이 좋고 언제 불편한지 세심하게 느끼고, 구분했다. 그리고 내가 왜 예스맨이 되었는지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생각이 과거로, 더 과거로 향했다.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 아빠에게 혼나며 울고 있는 나를 만났다. 무엇을 잘못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잘못이었든 5살 아이가 맞을 이유란 없다. 아파서, 무서워서 울었고, 운다고 더 혼났다. 화장실 간다는 말을 못해 바지에 오줌을 쌌다. 미리 말을 안 하고 오줌을 쌌다고 더 맞아야 했다. 옆에서 동동거리던 엄마는 아빠의 손에서 매를 뺏어들었고 내 기억도 거기에서 끝난다.      


  나는 일명 ‘착한 딸’ 이었다. 맞벌이 하시는 부모님을 대신에 동생을 돌보고, 내 공부를 스스로 챙겼다. 혼나는 일 자체를 만들지 않는 순한 모범생의 모습을 유지하며, 부모님의 의견이 곧 내 생각이었다. 대학갈 때까지는 공부만 하는 거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의문이 생기다가도 생각하기를 멈췄다. 아무런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우리 3형제는 예민한 구석이 있다. 후각도 청각도 그리고 분위기를 느끼는 감각도 매우 민감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작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던 아빠와 잘 살기 위해서는 늘 긴장한 채 지내야 했다. ‘사랑의 매’ 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 나는 넘어져서,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돌아와서, 오줌을 싸서 맞았다.      


   아주 어린 시절의 강한 기억은 스스로 발목에 족쇄를 채운다. 가정에서 행해지는 폭력은 더욱 그렇다. 언제 화낼지 모르는 아빠를 엄마는 말리려고 애쓰셨던 것 같지만 바로 중단 시키지 못하셨다. 한참을 맞고 난 후에야 상황이 종결되었다. 그 상황이 끝나면 아빠를 대차기 무섭고 어색했다. 아빠는 그런 나에게 아무 일 없는 듯 웃으며 장난을 걸어오셨다. 아마 아빠도 미안하고 어색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웃고 싶지 않았지만 따라 웃었다. 아빠는 그런 나를 뒤끝 없이 쿨한 성격의 딸로 기억하셨다. 나는 무서웠던 건데 말이다.      


   5학년 어느 날부터 아빠는 나와 동생들 누구에게도 매를 든 적이 없다. 아빠는 예전의 훈육방식을 옳다고 믿었지만, 어느 날 그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즉시 멈추었던 것이다. 물론 완벽주의 성격까지 달라지진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지만 적어도 맞아야 하는 공포는 없었다. 아빠의 태도가 달라졌을 때 그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냥 알았던 것 같다. 방식은 잘못되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라는 걸 말이다.      


   우리집은 모든 면에서 가족중심이었다. 가족들은 항상 함께 있었고, 모든 일을 함께했다. 주말에 대청소를 하거나 온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다 내가 실수를 하면 그 평화가 깨지고 집이 긴장으로 고요했다. 그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나 때문에 행복했던 우리 집을 공포에 쌓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고, 잘못을 숨겼다. 좋은 딸이 되면 나도, 나의 동생들도 계속 행복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 지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딸로 살아야할지, 어떤 언니가 되어야 할지만 생각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재수도, 휴학도 허락을 받아야 가능했다. 성인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빠에게 혼날 것을 두려워하던 5살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내 인생을 고민하지 않았던 십대를 지나 그대로 성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성적에 맞춰 입학한 대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부도 친구도 재미없었다. 재수하고 싶은 생각을 했지만 허락을 받아야 가능했다.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아빠는 단칼에 거절하셨고 나는 포기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빠는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이셨다. 더 어려워지기 전에 졸업시킬 수 있을까 걱정이셨다고 한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알고, 아빠와 다시 상의 했으면 어땠을까.       


    내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좋아했다면 그렇게 쉽게 포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말이다. 그렇게 나는 졸업만 하자는 심정으로 학교에 갔다. 억지로 하는 공부가 재밌을 리 없었다. 성적은 바닥이었고, 복구 불가능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다시 잘 살고 싶었다. 성적이 필요 없는 새로운 길이 보였다. 나는 결혼으로 새로운 삶을 꿈꿨다. 완벽하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서 모든 걸 만회 하고 싶었다.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선택한 결혼과 육아는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학원 강사는 오후에 출근하고 늦은 밤에 퇴근하는 직업이다. 아이들의 하원 후 육아를 전담할 조력자가 필요하다. 남편은 거의 매일 모임이 있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맞아 줄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시댁의 도움으로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다. 퇴근 후 밤 10시가 넘는 시간에 시댁에 들러 아이들을 챙겨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과 책을 읽거나 놀이를 했다. 금방 12시가 되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수업준비를 하거나 공부를 했다. 늘 잠이 부족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이었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들도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가족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셨다. 나도 당연히 그래야 했다. 가족은 언제나 가장 소중하고 내 인생 1순위였다. 20년 전 울산에 와서 불안증으로 학원을 정리하던 그 때까지 15년 간 친해 진 사람이 단 3명이라면 누가 믿을까. 가족 보다는 본인의 즐거움이 먼저인 남편과 살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최소한의 외출이었다. 일하고 아이들 돌보기만 해도 체력이 부족하기도 했고, 부모 중 한명은 책임지고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원을 시작하고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기 힘들 때 엄마가 집 앞으로 이사하셨다. 엄마가 아이들을 맡아주시자 일에 전념할 수 있었고 생각보다 빨리 자리가 잡혔다. 3년차에 들어 수익이 안정화 되고 고정적인 저축도 하게 되었다. 앞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성공을 계획해야 하는 그 순간 불현 듯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아웃이 오기 1년 전,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남편은 상가 하나와 사업을 물려받았는데, 함께 받은 빚도 상당했다. 상가 명의는 바뀌었지만 임대료는 여전히 어머님이 받고 계셨다. 상가에서는 매달 120만원 정도의 월세 수입이 발생했다. 상가 담보로 빌린 대출금 이자나 보수비용은 남편이 따로 지불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자동차 할부금 80만원 정도와 생활비로 매달 드리는 200만원도 너무 과하다고 생각되었다. 어머니는 연급을 포함하면 매달 580만원 가량을 소비하는 셈이었다.     


   우리 집 4인 생활비로는 350만원을 받았고, 나머지는 내 소득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시어머님을 부양하는 것에 대한 불만은 아니었다. 단지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우리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에게 드리는 용돈은 100만원이 채 되지 않았는데, 왜 어머님 한 분의 생활비는 500만원이 넘어야 하지? 주말이면 엄마, 아빠와 함께 학원 청소를 했는데, 3년 동안 남편은 단 한 번도 청소나 현수막 걸기 따위를 도와 준 적이 없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주말도 없이 일만하며 달려왔는지 지난 시간이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노는 불안과 우울로 변하고 나를 바보로 만들었고, 일을 중단해야 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외출하지 않고 잠만 자는 나를 보며 엄마는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오시고 맛있는 밥을 지어주셨다. 먹는 둥 마는 둥 방으로 들어가는 자고 또 잤다. 그 시간이 기회였다는 걸 그때 까지 전혀 모른 채, 나는 20년 전 결혼으로 도망치던 그 때처럼 세상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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