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 냥이 Nov 22. 2023

엄마의 마지막 선물

“우리 6년만 더 친하게 잘 지내봅시다.”


엄마의 암투병이 시작된 후,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전남편에게 했던 말이다. 5년은 둘째 아이가 20살이 될 때까지 남은 기한이었다. 아이들 모두 성인이 되는 그 때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재밌는 건 그런 말을 할 즈음 우리는 골프를 같이 시작하고, 조금 나아지는 듯 했다. 남들이 보기에 사이좋은 부부였다. 워낙 포장의 대가였던 나는 쇼윈도 잉꼬 부부 행세를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결론은, 나는 그 5년을 채우지 못했다. 2020년 12월 엄마가 돌아가셨다. 엄마 없는 세상은 아무 일 없는 듯 잘 돌아간다. 멈춘 건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멈추었고, 생각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다음해 6월 우리는 이혼 서류를 접수했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딱 6개월만이었다.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며 쉼을 시작했던 2019년 가을, 엄마는 췌장암 선고를 받으셨다. 소화기능이 약했던 엄마는 자주 체하셔도 그러려니 하셨다. 이번엔 위염인지 속쓰림이 심해 동네 내과를 찾아 내시경을 했다. 위궤양이라고 했다. 약을 2달 정도 먹어야 한다는 말에 정기적으로 약을 받아 복용했지만 위궤양은 낫지 않았다.     


엄마는 등이 아프다고 하셨다. 등의 통증으로 검색을 해보니 췌장암 증상이다. 설마 하는 마음에 동네 다른 내과에 시고 갔다. 재검사 결과를 본 의사는 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엄마의 통증이 췌장암의 증상이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닐 거라 생각했고, 그래야만 했다.      


예약하지 않고 바로 검사를 받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응급실로 들어가는 거다. 그 즈음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던 터라 내과를 나와 바로 대학병원으로 갔다. 응급실은 늘 그렇듯 환자들로 가득했다.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옆 자리 환자가 돌아가고 새로 들어온 환자가 그 자리를 채웠다. 엄마의 검사 결과만 유독 늦어지고 있었다. 불안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나는 말없이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을 지난 후에야 심각한 표정으로 나타난 의사는 죄송하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췌장암이었다.      


“아...” 암 이라는 소리에 응급실 침대 위에 힘없이 앉은 엄마 다리에 그대로 엎드렸다. 나는 울었고,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 하셨다. “울지 마... 엄마는 나을 수 있어. 알지? 넌 너의 일상을 살아!” 엄마는 그런 분이셨다.       


그 즈음 강의를 시작했는데, 매일 강의한 사진을 엄마에게 보내드리는 게 나의 일이었다. 무슨 강의든 마다 않고 다녔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제일 먼저 엄마에게 사진을 보냈다. 엄마는 아빠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며 무척 좋아하셨다. “봤어? 내 딸이야!”      


엄마의 암투병은 기대만큼 효과를 보지 못했다. 조금 나아지는 듯하면 엄마가 견디질 못하시니 계획했던 약의 50% 양으로 치료가 진행 되었다. 150cm에 45키로 남짓하던 작은 몸이 더 작아졌다. 순식간에 초등학생 저학년만큼 작아진 엄마는 마약성 진통제를 드시면서도 찌개를 끓이고 김치를 만들어 날랐다.     


암투병 1년 만에 엄마는 항암을 중단되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시한부가 되고서야 아주 오래전 얘기를 꺼내셨다.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시누이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엄마의 심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스물일곱 살이었던 2004년 여름, 첫째 아이가 돌을 막 지난 어느 날이었다. 시누이가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엄마는 그 날 이후로 편히 잠을 못 주무셨다고 한다. 모든 탓이 나에게 돌아갈 게 빤히 보였는데, 차마 이혼하게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엄마는 “미안하다, 그때 널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 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엄마도 울었다. 엄마와 헤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울었고, 내 결혼이 나만 갉아 먹고 있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암 선고를 받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엄마의 눈물이었다. 엄마의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지난 20년이 억울했고, 서러웠다.      


엄마는 나도 그렇게 죽을까봐 매일 걱정으로 보냈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내 얼굴을 볼 때 마다 그 생각이 떠올랐다고 하셨다. 점점 말라가는 딸에게서 한 달 씩 연락이 없으면 너무 무서워서 사위에게 전화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이미 죽었는데 그 집에서 숨기고 있을 것 같았다는 엄마의 말에 가슴이 무너졌다. 엄마가 아프게 된 게 모두 내 탓인 것 같았다.     

 

아 이 거지같은 결혼이 엄마 까지 돌아가시게 하는구나. 평생 내 마음을 누르고 있던 커다란 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행동과 가슴에 비수를 꽂는 그 잔인한 말들을 듣고만 있었던 이유. 그 날 그 일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나를 억누르고 입을 다물게 했다. 한 번만 올라가 보았더라면. 한 번만!     


그날은 학원 여름휴가 마지막 날이었다. 작고 예쁜 아기는 낮잠을 자고 있었고, 남편은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책 한권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가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참 좋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조용히 쉬는 마지막 휴일이었다.      


오전 10시 즘 차를 정비하러 나가셨던 어머니는 1시 즘 돌아오셨다. 당시 우리는 2층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는 1층 부모님은 2층에서 살고 계셨다. 새로 사온 화분을 1층 현관 바로 옆 화단에 옮겨 심으시고는 손녀딸과 놀아야겠다며 우리 집으로 들어오셨다. 잠시 후 멀리 그리스에서 오신 시 고모님도 오셨다. 우리는 과일을 먹었고, 티비를 봤고, 귀여운 아기와 놀아주었다. 우리는 웃었고 즐거웠다.      


4시 즘, 어머님과 고모님이 아이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얼굴이 하얘진 고모님이 뛰어 내려 오셨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얼굴에 비친 다급함과 공포가 무슨 일이 생겼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서윤이!!” 빨리! 심장이 밖으로 나올 듯 뛰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전남편과 나는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서윤이는 현관에 앉아 울고 있었다. “가위!” 어머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를 꼭 잡고 있는 어머님이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보여주면 안 된다는 생각. 전남편이 스카프를 끊어 내고 아가씨를 눕히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계속 빌었다. 안 된다고. 살려달라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병원!!” 누군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이를 안고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119를 눌렀다. 손이 덜덜 떨리고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가씨가! 살려주세요!” 겨우 상황을 설명하고 전화를 끊는데, 뒤에서 아이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이! 데리고 내려가라! 빨리!” 그 사람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이가 아무것도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이를 들쳐 업고 계단을 내려갔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우리가 살던 집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와야 대문이 보였다. 아이를 업고 밖으로 뛰어 나가 앰뷸런스를 기다렸다. 1분, 1분, 1분. 엠뷸런스는 오기 전 경찰이 먼저 도착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조사를 하는 게 필수 라고 했다. 한참을 지난 후에야 아가씨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병원도 아가씨를 살려내지 못했다.       


이 일로 나는 여러 번 원망을 들었다. 병원에 전화 하라고 했더니 경찰을 불렀다며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야기 하는 어머니를 말리지 못했다. 어차피 내 말은 믿지도 않으셨다. 그리고 미안했다. 가족이라면 서로를 좀 더 살피고 돌봤어야 했는데, 내 탓만 같았다.      


그 날부터 나는 매일 그 날 아침을 떠올렸다. 점심을 챙기러 올라가는 나를 상상했다. 내 생각 속에서 나는 그 계단을 수천 번 수만 번 올랐다. 그래봐야 아무 일도 달라지지 않았다. 10년이 지나고 나서는 며칠에 한 번 으로 횟수가 줄었지만, 여전히 나는 아가씨에게 미안했다. 거리에서 우연히 아가씨와 닮은 사람을 보게 되면 웃으며 다가가려다 놀라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내가 나에게 채운 족쇄는 죄책감과 미안함이었다. 그 날 이후 어머니는 매일 밤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그 전에도 술에 취한 날이면 새벽 1시에도 찾아오셔서 한참을 하소연 하고 가시던 어머니였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아픈 마음이 헤아려 졌기 때문에, 그리고 내 스스로 채운 족쇄 때문에, 나는 매일 밤 어머니를 위로했다.      

어머니는 자주 우리 궁합 이야기를 하셨다.      


“너희들 결혼시키면 집에 큰일이 생긴다고 했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는 구나.”      


너 때문에 내 딸이 죽었다는 말로 들렸다. 억울했지만, 어머님이 너무 불쌍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떨어뜨리고 어머니가 올라가시길 기다렸다.    

 

아가씨가 돌아가시기 전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을 때, 어머니께 했던 말이 있다. 아가씨 아직 결혼도 안하셨는데, 누가 보면 오해 할 수 있어 걱정이라는 말이었다. 2살 많은 아가씨지만, 남편의 동생이니 나도 동생처럼 생각 되었다. 내 동생이라면 바로 할 말을 하겠지만 쉽지 않았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가씨가 결정할 일이었는데, 내가 선을 넘은 건 분명하다.      


어머닌 아가씨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그 말을 전했다고 하셨다. 아무래도 그 말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치 혀가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죽어갔고, 생각하기를 멈췄다. 이 집에서 어머니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 일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도 동생에게도 할 수 없었다. 특히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마음 아프실지 잘 알기에 나 혼자 감당할 일이라 생각했다. 죽음을 앞 둔 엄마에게서 그 때 일을 다시 듣게 될 줄 생각지 못했다. 아주 오랫동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기억과 마음이 엄마의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그 일이 내 탓이 아님을 알고 나를 설득해도 나아지지 않던 마음이었다. 엄마가 알고 있었고, 망설였다는 그 말이 저주의 족쇄를 풀었다. 무슨 짓을 해도 당해주던 나는 사라졌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나에게 1시간이 주어진다면,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는데 55분을 쓰고, 해결책을 찾는 데 나머지 5분을 쓸 것이다.”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마음의 병은 그 시작점을 찾아 풀어내야 한다. 잠깐의 놀이나 기분전환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잠시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나빠진다. 나는 아주 오래 전 내 문제를 해결할 힘을 잃었고, 직면할 용기가 없었다. 엄마의 마지막 선물은 내가 나답게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었고, 격려였다.      


이혼이 확정 되던 날 법원 앞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청량했다. 저기 어딘가 엄마가 있겠지? 하늘을 보고 말했다.      


“엄마!!!  나는 용감하게 내 삶을 살아갈 거고, 행복하게 살거야!!”  엄마는 내 말을 들었을까?

이전 05화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겠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