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ve and Take
인문관에서 나와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에, 갑충 한 마리를 봤다. 침대에 누워 이도저도 못하는 그레고르처럼, 경계석 위에서 뒤집힌 채로 다리를 휘적거리고 있었다. 바둥거리는 몸짓이 퍽 애처로웠지만, 애써 못 본 채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왜 그랬던 걸까. 끊임없이 고민해 보았지만, 그 딱정벌레에게는 미안하게도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이 활보하는 대낮에 쭈그리고 앉기에는 낯 뜨거워 그랬을 수도 있겠다. 혹은,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에 조금이라도 더 있기 싫어서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여튼, 똑 부러지는 이유 따위는 마련해놓지 않고, 그냥 무의식적으로 지나쳤다. 동심이 가득했던 때와는, 분명하게 다르다.
어린 시절에 지렁이 한 마리를 흙으로 되돌려 보낸 기억이 있다. 아스팔트 위 물기가 적당히 말라갈 적, 따가운 돌바닥 위에서 파닥거리는 지렁이 말이다. 위태로운 자신의 처지를 알기라도 했던 것일까. 굳이 햇빛이 아니더라도, 아슬아슬했다. 검은 빛으로 갈라지기 전에, 차 바퀴에 납작해지기 좋은 위치에 누워 있었으니.
벌레를 혐오하는 성격이라면 밟아버리거나 손사레를 쳤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징그러움과는 거리를 두며 산다. 오히려 흥미롭게 보는 타입이다. 나름의 동심도 있던 시절이라, 벌레 만지는 걸 개의치 않기도 했다. 차라리 지나가기보다는 다가가는 길을 항상 선택했던 것이다. 말라 죽어갈 생명에 동정심을 느낀 나는, 맨손으로 지렁이를 집어 풀숲으로 던졌다.
우연의 일치인지, 마침 절 근처에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스님까지 지켜보는 개심사 문 앞에서. 생명을 구했으니 큰 복이 있을 거라고 말하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당시 예비 번호를 받고 대학의 문턱에 걸려 있던지라, 대학 붙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던 것 같다. 그 소원이 잘 돼서 여기 다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생명값을 너무 쉬운 곳에 걸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대학도 값지지만, 생명에 비하면 너무 가볍지 않을까. 더 값어치 넘치는 보상이 있었을 텐데. 가령 로또에 당첨된다든지, 내가 뭔지도 모를 일로 갑자기 입소문을 타고 떼돈을 벌게 된다든지. 어쩌면 나도 대가만 바라보고 싶나 보다. 베푼 만큼 항상 돌아온다면 정말 편한 삶일 거다. 대가를 깨닫게 된 나날부터 인생은 불편해졌지만, 어쨌거나 항상 그것만 보고 살게 되었다. 관심 없는 척 훔쳐보는 잔재주만 익숙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별에 별 잡념을 다스리며, 도서관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네이버 홈페이지에 들어가자, 별안간 알집 광고가 구석에서 올라온다. ‘외로이 사는 OO를 위해 기부해 주세요’ ‘아픈 △△에게 희망을 보여주세요’ 나보다 훨씬,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사회의 보호망 안에는 있으니, 나는 참 다행이다. 운 좋게도, 손발이랑 가족도 멀쩡하니까.
그것과는 별개로, 공익 광고조차도 무표정으로 외면한 채, 스킵 버튼으로 지나친다. 대가가 없으니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대가 없는 호의, 말은 참 아름답지만 요즈음 세상과는 좀 어색하다. 호의를 베푼 내가 위태로워져도 나의 사연은 인스타 게시물로 소비될 뿐이다. 그러니 모른 척할 수 밖에.
이제 지렁이는 살기 위해 돈을 내야 한다. 새까맣게 그을리기 전에, 수당을 지불하여 자신이 가치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건져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나와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그 자리로 다시 가보았다. 비참하게 죽어버린 벌레 시체, 그리고 주위에 바글대는 개미 떼를 보고,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보상이 있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