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먼 길을 떠난 후 순백의 날을 세운 바람이 큰 물결을 싣고 오면 밤새워 뒤척이던 동해도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곧이어 만삭의 굴레를 벗은 해가 물기를 머금은 채 솟구쳐 오릅니다. 숨죽이며 누워있던 파도도 이내 달궈진 용광로처럼 붉게 타며 출렁거립니다. 햇살 가득한 바다도, 푸른 하늘도 모두 한 몸으로 눈부신 웃음을 날리는데 가늠할 수 없는 설렘에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립니다. 문득 뜬금없는 질문 하나가 날아듭니다.
“그대는 끓는 햇덩이를 품어 본 일 있는가? 한 번쯤 깊은 사유를 불사른 일이 있는가?”
스스로 일갈한 화두에 깜짝 놀라 몸서리칩니다.
물 젖은 해가 몸을 털면 파도는 다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용트림합니다. 그 빛 부신 비늘들이 먼 길 떠났다가 돌아오고, 다시 먼 곳으로 떠나곤 합니다. 햇볕 따가운 수평선 위에 그림처럼 떠 있는 고기잡이배 위로 구름이 뭐라고 속삭이는 듯합니다. 모든 소리는 바람이 조율하고, 햇살은 그 현(絃)을 따라 일렁입니다. 풍경을 파고드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에 소라고둥 노래도 실려 옵니다. 가끔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갈매기의 날갯짓이 파도를 벗 삼아 백사장에 서 있는 나를 어느새 물새가 되게 합니다. 때때로 파도는 은빛 춤추는 물보라로 가슴에 안겨듭니다. 귀를 막을수록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부표(浮標)도 없는 바다, 밀고 밀리는 파도만이 반복해 동해를 이룹니다. 바다는 기쁨이나 슬픔 같은 것 모두 파도 속에 삼키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출렁입니다. 어디에 부딪혀도 하얀 이 드러내며 웃습니다. 노래를 부르면 소리가 점점 커지고 뜨거워집니다. 피를 토하며 부르는 노래는 절규가 됐다가 절규는 어느새 포말로 부서져 다시 노래가 됩니다. 하늘로 증발하는 그 수증기의 여운이 꿈결 같아 돌아서서 다시 노래 부르면, 그 노래는 메아리조차 남기지 않고 이내 파도 소리에 휩싸여 사라지고 맙니다. 이따금 물기가 축축한 뱃고동 소리가 대신 메아리치지만, 파도는 끝없이 이를 지웁니다. 한없이 흔들리던 내 마음의 닻도 그저 바다에 맡겨진 채 정해지지 않은 어딘가로 떠나갑니다.
동해엔 섬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눈을 감아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섬이 하나둘씩 떠오릅니다. 그 섬에서 구름 한 점 베어 물고 사라진 바람, 여전히 여운으로 남아 있는 물 젖은 고동 소리….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랑이나 이별 따위를 꿈결처럼 아득하게 하는 섬, 은비늘 낮게 엎드린 수평선으로 온갖 고백이 바다의 늪으로 사라집니다.
밤이 되면 동해에는 네 개의 달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하늘에 뜨고, 하나는 바다에 뜹니다. 또 하나는 경포호(湖)에 뜨고, 다른 하나는 마주 앉은 사람의 눈에 떠오릅니다. 어디에 뜨든 달은 부둥켜안습니다. 하늘이 바다를 안고, 경포를 안고, 마주한 사람을 안습니다. 바다도 하늘을 안고, 경포를 안고, 마주한 사람을 안습니다. 경포도, 마주 앉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누구를 어디에서 얼싸안든 달은 금빛 결을 빚어냅니다. 구름도 바람도 거듭니다. 이럴 때면 자연도 사람도 다 움직이는 정물화가 됩니다.
남해가 많은 섬이 옹기종기 그림처럼 떠 있고 잔잔해서 여성적이라면, 동해는 검푸르게 드센 파도가 힘차게 출렁대는 남성적인 느낌을 줍니다. 서로 다른 멋이 있지만, 동해가 주는 거대한 울림은 특별한 느낌을 안겨줍니다. 가뭇한 눈 끝을 세워 수평선을 바라보면 칼날 같은 바닷바람이 발톱을 세우며 잠들었던 세상을 한꺼번에 깨우곤 합니다. 순간, 저 멀리 독도에서부터 물 소용돌이를 일으킨 파도가 용트림하며 숨 가쁘게 달려옵니다. 이렇게 온 세상에 부활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 같을 때, 저는 수평선 한가운데에 푸른 빛 부표(Buoy)하나 띄우고 꿈 넘어 꿈을 꾸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