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9개 만들어서 사진 찍는 게 숙제야."

by 런펀맨

평일 저녁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퇴근 후 아내, 8살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저녁 메뉴는 김치찌개와 치킨 한 마리. 치킨만 먹으면 속이 좋지 않아, 먼저 김치찌개 1/3 그릇을 먹은 후 치킨을 먹었다. 치킨에 손이 가기 전, 아이가 내 옆으로 오더니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시간에 배운 종이접기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색종이로 윗면이 뚫린 박스를 만드는 종이 접기였다. 조그마한 손으로 종이를 접는 게 귀엽고 기특해서 연신 칭찬을 날렸다. 그 어려운 박스 만들기를 어쩜 그리 잘하냐고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본격적으로 치킨을 먹기 시작했고, 아이도 같이 치킨과 사이드 메뉴를 먹었다. 저녁식사를 마치니 아이가 나에게 종이접기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말했다. 아이가 책장에서 반짝거리는 색종이 2장을 꺼내왔다. 아이는 나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종이를 단계별로 접었다. 아이는 혹시나 내가 본인을 못 쫓아갈까 봐 염려하면서, 천천히 하나씩 접었다. 조잘조잘 설명도 끊이지 않았다.


색종이로 박스 만들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이가 접는 걸 보고 따라 하며 어떻게든 1개를 만들긴 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고 2개를 만들기는 불가능했다. 첫 번째 종이 박스를 완성한 후 아이는 색종이를 4장 꺼내왔다. 본인 2장을 갖고 나에게 2개의 색종이를 주었다. 잘 따라 해보라며 2장의 색종이를 단계별로 접기 시작했다. A종이 1단계 접기, B종이 1단계 접기, 다시 A종이 2단계 접기, B종이 2단계 접기... 단계별로 접으며 나에게도 C/D종이를 똑같이 접어보라고 지시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즐기는 모습이 기특하고 귀여워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 접었다. 아이 속도에 맞춰 C종이 1단계 접기, D종이 1단계 접기, 다시 C종이 2단계 접기, D종이 2단계 접기... 그렇게 총 6개의 종이 박스가 완성되었다. 맨 처음 만든 거 1개씩, 두 번째 만든 거 2개씩. 퇴근 후 몸은 피곤했지만 아이가 원하는 놀이를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거 9개 만들어서 사진 찍는 게 숙제야."


그랬다. 아이는 숙제를 하기 위해 내 손을 빌린 것이다. 아빠와 학교에서 배운 것을 같이 하며 즐긴 게 아니라, 숙제를 완성하기 위해 나에게 종이접기를 같이 하자고 한 것이었다(믿고 싶지 않지만...).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으면서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배꼽 터지게 웃음이 나왔고, 1~2분 정도 숨 넘어갈 정도로 웃기만 했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아이도 덩달아 까르르 웃었다. 아이가 숙제를 위해 내 손을 활용한 게 씁쓸하긴 했지만, 나를 거실에 앉혀서 종이접기를 하게 한 그 요령이 웃음 터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우리 딸, 이렇게 요령 있게 살면 어딜 가더라도 굶어 죽진 않겠구나'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이와 함께 놀고 웃는 그 순간이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구나, 하는 걸 느낀다. 아이가 어릴 때 한 번이라도 더 같이 놀고, 이야기하고, 추억을 쌓고자 한다. 언제든 미소 지을 수 있는 작은 기억들이 쌓이면 스토리가 있는 삶, 행복한 인생을 사는 거라고 믿는다.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 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남들이 보기엔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귀하다. 우리는 겉으로 번쩍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번쩍거리지 않는다.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다. 스토리텔링에는 광택이 없다.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다.” (출처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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