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돌아온 첫사랑, 성찬포도주
우리들은 집에서 가져온 포도주로 잔치를 벌였다.
집에서 담근 포도주는 미사용 포도주와는 전혀 맛이 달랐다. 의미도 비교할 수 없었다. 성찬포도주가 거룩하고 경건하고 우아한 느낌을 자아냈다면, 집에서 담가 밥상에 오르는 약용포도주는 달고 시큼했고 무겁고 탁하고 독했다.
공기의 노출이 지나쳐서 포도안의 당분이 과다 숙성하여 맛은 감미로웠지만 혀에 끈적끈적하게 남았다. 잼처럼 졸아진 농익은 과일향이 애매하게 목과 코에 감겼다. 탄닌이 너무 많아서 안쪽의 목구멍이 바싹 마를 만큼 신맛이 났다.
발효가 지나친 포도주스 같다고나 할까. 음악으로 따지면 남도 바닷가의 판소리 창(唱) 같았다.
집에서 가져온 할아버지 전용의 약용포도주를 마시고 나서야, 처음 마셨던 성찬용 포도주의 맛과 향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깨달았다. 전관이 명관임을, 떠나간 첫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경험했던 성찬용 포도주의 맛은, 첫 키스였다.
혀를 감미롭게 적시던 신비한 맛이 코의 점막에는 미묘한 방향으로 스몄었다. 서정적인 선율의 아리아가 가슴에서 은은하게 휘돌았다. 벨벳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꽃다운 맛이었다.
알 것 같았다. 성당에 침입한 도둑은 신발이나 성작 성반 등의 물건을 노리는 도둑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작에 담긴 포도주, 죽은 시체가 나왔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토굴에서 익고 있는 포도주를 노렸음이 분명하다.
탈무드의 일화인지는 불명이나, 악마가 포도농장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소원을 물으니 “포도농사가 잘되어 좋은 포도를 수확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농부를 골탕 먹이려는 악마는 각종 짐승의 시체를 모아 포도밭에 묻었고 그해 풍부한 자양분을 섭취한 포도농사는 대풍이 들었다. 그 대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면 사람이 짐승처럼 변하게 된다고 한다.
미국 워싱턴 근처 와이너리
첫사랑은 떠나고 어느덧 세월이 흘러 흘러 나는 무슨 술이든지 어떤 사랑이든지 향유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
나는 야금야금 세상의 술을 다 섭렵해 가고 있었다. 해산물요리에는 백포도주를, 육류요리에는 적포도주를, 그리고 마지막 입가심 술로는 꼬냑을 마신다는 미식가들의 저녁식사에도 초대를 받아 봤고, 햇포도로 만든 와인 보졸레누보가 출시되는 날을 기념하여 열리는 보졸레누보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포도주의 숫처녀 보졸레누보를 맛보는 파티에서 만난 남녀가 첫눈에 사랑에 빠져서 야반도주 줄행랑을 쳐서 인생을 조지는, 그러나 사랑에는 여한이 없다는 소설도 지어냈다.
내가 맛본 성찬포도주는, 음주허용법적 연령에 도달치 못했던 10대 소녀의 눈도 멀고 귀도 먼 사랑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죽음에 이르는 눈먼 사랑이라니. 상상만으로도 황홀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문득, 또 문득 빌어먹을 첫사랑이 떠올랐지만, 오감으로 느끼던 추억만 간직하자 했다. 더구나 내 주위에는 나를 유혹하는 사탄과 천사의 사생아 같은 술, 와인들도 많았다.
-그까짓 미사주, 흥, 칫, 내가 처음 맛보았으니까 멋모르고 좋았던 거지, 지금 마셔보면 실망할 거야, 첫사랑 애인 다시 만나보고 실망 안한 사람을 내가 못 봤다. 흥-
시간의 강물에 추억마저 실어 보냈다.
성찬포도주를 ‘마주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난 것은 그 뒤로도 강산이 여러 번 변한 후였다.
내가 시동생신부님이라고도 부르는 신부님은 수정엄마의 시동생이다. 수정엄마는 30대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형을 잃은 슬픔이라기보다 남편을 잃은 형수님이 가여워서 시동생신부님은 많은 시간을 조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형수님하고도 많이 놀아줬다.
수정엄마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성당의 구역장이기도 했고, 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같은 학부형이기도 했다. 성당에서 아이들 학교에서 레지오마리에에서도 만났다.
시동생신부님과 그의 친구신부님과 수정엄마와 내가 어울려서 골프도 하러다녔다. 골프라운드를 하면서 신부님 돈을 따먹으면 ‘지옥행 특급열차의 특등석 예약 완료’라고 해서, 내기가 걸린 라운드에서는 언제나 져 줬다. 아니 실력이 없어서 졌다.
어느 날 신부님이 내게 미사주 마주앙 2병들이 한 세트를 주셨다.
그 때까지만 해도 미사용 포도주를 다시 만난다는 설정은 내 술 인생에서는 없었다.
미사용 포도주를 각 본당 별로 담그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구에서 ‘오비맥주’회사를 통하여 일괄적으로 ‘마주앙’이라는 와인을 내놓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1977년부터는 오비맥주에서, 현재는 롯데주류에서 미사주를 생산하지만 시판하지는 않고 전량 한국천주교미사주로 봉헌한다고 한다.
더구나 현재 미사주 마주앙은 살아있는 전설을 넘어 거룩한 와인으로 로마교황청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내 손에 닿을 수 없는 줄 알았다. 장발장처럼 목숨을 걸고 성당으로 훔치러 들어가면 모를까.
본당신부님이 술을 즐기시는 분이면 가끔 식사 때 반주로도 미사주를 소비하고, 선물용으로도 소비한다는 정보도 귀동냥으로 들었지만 이렇게 내게까지 차례가 올 줄은 몰랐다는 말이다.
술을 안 마시고 못 마시는 우리의 시동생신부님은 성찬용이 아니면 미사주 마주앙을 소비하지 않기 때문에 본당에 배정된 분량에서 여분이 있었다고 했다.
또한 골프라운드 내기에서 허구한 날 돈을 잃는 나를 긍휼히 여기시어 미사주를 내리셨을 게다.
오오, 돌아온 첫사랑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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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돌아온 첫사랑, 성찬포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