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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 Aug 13. 2022

13)기승전술,세라비!
起承轉酒,C'estLaVie!

052/ 돌아온 첫사랑, 성찬포도주

052/ 돌아온 첫사랑, 성찬포도주 


술이 발효되는 냄새, 술이 익는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나는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엄마의 품에 안겨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성당 부속유치원에 다니던 6살에 첫영성체를 했다. 자라면서 나의 놀이터는 성당 마당이었다. 


성당의 본당건물 뒤쪽에도 본당식구들의 겨울 양식을 보관하는 토굴이 있었다. 토굴 안에는 포도주가 익는 항아리가 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토굴에서는 전쟁 때 죽은 시체의 해골들이 무수히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마 성당에서 쓸 양식과 미사용 술의 보안을 위한 경고소문일 터였다. 


먹고 살기가 참 힘들었던 시절이었고, 신발도 설빔으로나 얻어 신던 시절이라, 성당에 예배를 드리러 갔다가 신발을 잃어버리는 일도 잦았고, 미사용 제구가 도둑맞았다가 돌아오던 사건도 있었다. 


도둑이 번쩍번쩍 빛이 나서 금인 줄 알고 훔쳤는데, 값이 별로 안 나가는 황동에 금으로 도금한 물건이라 돌아왔을 것이라고들 했다. 하긴 나도 성작과 성반이라 불리는 미사용 포도주를 담는 잔이랑 제병을 담는 그릇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줄 알았다. 


순금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자체적으로 발광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성혈과 성체가 담긴 성작과 성반은 바라보기만 해도 숙연해져서 경건한 마음으로 우러르고는 했다. 


가톨릭 학생회의 셀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지루한 셀 모임의 성경공부가 끝나고, 미사예식이 이어졌다. 항용 미사예식은 본당건물에서 이루어지지만 그날은 예외적으로 사제관 학생 회의실에서 미사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나는 나의 역할인 성경구절을 봉독하고는 얼른 맨 뒷자리로 돌아왔다. 좀 졸기 위해서였다. 


신부님의 강론이 끝나고 성찬전례로 흘러가고 있었다. 복사학생이 커다란 빵 한 덩어리와 포도주가 담긴 주전자를 신부님에게 건넸다. 신부님은 빵 한 조각을 먼저 떼어 드시고 잔에 포도주를 조금 따라 드셨다.  


복사학생이 빵과 포도주를 앞자리부터 차례로 뒷자리로 넘기는 모습은 막 졸음의 너울 자락이 덮이는 흐린 눈에 담겼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뒷자리 학생들에게 까지 빵과 포도주를 골고루 돌아가게 배려하느라고 빵은 손톱만큼만 떼어먹고 포도주로는 혀만 축이는 것 같았다. 나는 점점 심오한 묵상에 빠지고 있었다. 


성찬의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학생들은 신부님께 성경의 구절에 대해 질문했고, 신부님은 열과 성의를 다하여 설명하셨다. 셀을 지도하던 신부님은 이제 막 부제서품을 받아 부임하셨는데, 무엇보다도 학생신도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의욕적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분이셨다. 


그러는 사이 맨 뒤쪽에 앉아있던 나에게 까지 빵과 포도주가 담긴 주전자가 전달되었다. 

“소피아, 이거 마셔.”


옆자리의 한 학년 선배가 내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나는 묵상 중 영성이 도저해져서 의자에서 떨어지며 앞으로 꼬꾸라지려는 찰나였다. 다가오는 잔을 엉겁결에 받았다. 그리고 꿀꺽 마셨다.


“와아, 이거 뭐야 맛있당.”

묵상의 심연에서 빠져나왔다. 잠이 팍 깼다. 


“나도 한 잔 줘야지.”

나는 선배의 명령에 그녀에게 잔을 건네고 주전자 안의 내용물을 가득 따라주었다. 그녀도 꿀꺽 마셨다. 


“이것도 먹어”

그녀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빵을 한 움큼이나 떼서 내게 줬다. 나는 배도 고팠던 차라 빵을 한입가득 우겨넣었다. 그녀도 남은 빵을 쩝쩝 먹었다. 


곧 나는 묵상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맑은 정신으로 선배가 따라주는 남은 액체를 마셨다. 그녀는 내가 따라주지 않으니까 자작으로 마셨다. 


복사학생이 남은 술과 빵을 수거하여 사제실에 가지고 가야했는데, 그날의 복사학생은 성경토의에 열을 올리느라 뒷자리에서 술과 빵으로 음식을 차려 큰잔치를 벌이는 줄도 몰랐었다. 


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까 무릎이 휘청거렸다. 어지러워서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무언가를 짚었는데, 성당 건물 옆에 세워진 성모마리아 석상이었다. 내가 짚은 곳은 성모마리아의 발이었다. 성모마리아는 뱀의 머리를 밟고 있었다. 사악한 뱀이 성스러운 마리아의 발가락을 꽉 물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사진설명: 전주전동성당 / 사진출처: traveli.co.kr  


호주머니에서 크레용이 만져졌다. 꺼내보니 빨강색 크레용이었다. 나는 초등학생들의 주일학교 보조교사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내 주머니에는 초등학생용 문구들이 발견되고는 했다. 


나는 마리아의 발가락에 색칠을 했다. 희고 신성한 발가락이 선정적인 발가락으로 변했다. 다 보고 계셨는지, 아니면 누가 고자질을 했는지, 하늘 멀리에서 ‘성스러움을 훼손하지 말라’는 꾸짖음이 들려와서 고개를 들었다. 성모상의 머리위로 광휘처럼 낮달이 걸려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였다. 

“소피아, 네가 크리스마스 파티에 쓸 포도주 가져와라.”


지금도 그 선배가 내게 왜 그런 명령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좌우간 나는 성당에서 학생미사에 쓸 포도주가 부족하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더니, 할머니는 한 되들이 주전자 가득 포도주를 퍼주셨다. 물론 우리들은 집에서 가져온 포도주로 잔치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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