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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 Aug 06. 2022

12)기승전술,세라비!
起承轉酒,C'estLaVie!

051/ 돌아온 첫사랑, 성찬포도주

051/ 돌아온 첫사랑, 성찬포도주 


우리 집의 작은 마당에도 학교 운동장 화단에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수수꽃다리도 흐드러지게 피었던 봄이었다. 


산 아래 한옥 마을에 있었던 우리 집은 뒷동산 중턱쯤에서도 집 마당과 처마아래 마루가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하교하여 책가방을 던져놓고 툇마루에 앉아 눈을 들면 파란 하늘에는 돛단배처럼 뭉게구름이 떠갔고 먼 산은 물오른 나무들이 희망처럼 푸르렀다. 


세수수건을 목에 걸고 우물물 담긴 대야에 손을 담그자 물위로 동그란 해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웬 소년이 산 중턱에서 서산의 지는 해를 거울로 받아 남쪽으로 열린 우리 집 마당으로 되쏘고 있었다. 뒷동산에 올랐다가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집 마당에 세수하러 나온 여학생이 우연히 낚였나. 짜아식, 장난 거울질이라니. 


나는 사춘기를 관통하는 소녀시대에 있었다. 내가 그리 남에게 예쁘단 소리는 못 들었어도 스스로는 내가 꽤 예쁜 아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시절 종종 까까머리 남학생이 하교 길에 집까지 따라오며 슬쩍 책가방 속에 쪽지를 넣고 꽤나 부끄러워하며 도망가기도 했고,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올 때도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쭈뼛거리며 말을 걸고는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마루는 분홍색 진달래꽃이 수북하게 담긴 함지박들 때문에 엉덩이를 내려놓을 자리가 없었다. 


꽃향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떻게 저리도 많은 꽃이 우리 집으로 왔을까. 꽃은 가지도 잎도 없이 모가지 꺾인 꽃송이들 뿐이었고, 그런 꽃송이가 가득 담긴 함지박이 서너 개였다. 


잔 바람결에도 꽃잎이 파르르 떠는 꽃무더기 사이에 마른 꽃처럼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할머니는 진달래꽃을 손으로 한 움큼씩 퍼서 커다란 독에 담았고 꽃잎이 다 가려지도록 밥공기로 설탕을 퍼부었다. 


설탕이 함박눈처럼 내려 앉아 진달래꽃이 눈 속에 묻히면 또 그 위로 설탕이 안보이도록 목 부러진 꽃송이로 덮었다.

 

“할머니, 진달래꽃이네요. 예쁘기도 해라. 이 꽃송이로 뭐 하시는 거예요?”

나는 진달래꽃을 한 움큼 집어 머리에도 꽂고 꽃자루를 쪼옥 빨아도 보았다. 


“넌 알 것 없다. 할아버지 약이다. 들어가서 숙제나 해라.”

할아버지의 약을 만드는데 내가 보면 부정이라도 타는 양 할머니는 나를 방으로 쫓았다. 


꽃으로 약을 만들다니. 나는 그 즈음 조간신문의 성인용 연재소설을 어른들 몰래 읽고는 했다. 남녀주인공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는 것으로 봐서 얼마나 미혹되어 읽었는지 싶다. 


그런 소설 속에서 자주 나오는 불로장생약이나 이성을 정신 못 차리도록 후리는 최음제 등은 꽃을 태산만큼 모아서, 혹은 순결한 여자의 피를 받아서 만들고는 했다. 그런 불로장생주인가. 


진달래화전 /사진출처: naver 지식백과


할머니는 해마다 할아버지를 위한 약이라고 부르는 두견주를 머루주를 포도주를 담그셨다. 그렇게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의 약용주가 사시사철 상비되어 있었고 아무도 감히 이를 탐내지 않았다. 


내가 성스러운 장소에서 성스러운 방법으로 포도주를 맛보기 전까지는.


우리 집 뒤란에는 닭장도 있고 마당에는 손바닥 텃밭도 있었다. 겨울이면 땅을 파고 겨울 양식인 김칫독을 묻었고, 평생 양식인 간장 고추장 된장 항아리는 단을 쌓아 올린 장독대에서 볕을 받았다. 작지만 광이라고 부르는 곳간이 있어, 독 속에 볏짚을 깔고 홍시를 보관했고, 홍시가 담긴 항아리 옆에는 틀림없이 술항아리도 있었다. 


고구마 서리를 하러 컴컴한 곳간에 잠입을 하면, 더 컴컴한 곳에 놓여있던 술항아리 속에서는 보글보글 공기방울이 올라오는 소리, 공기방울이 톡톡 터지는 소리가 났다. 술이 발효되는 냄새, 술이 익는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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