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타임캡슐,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김 작가, 이달 마지막 일요일에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등산 갑시다.”
“어쩌나. 산행 선약이 있어요.”
박 화백의 데이트 신청을 나는 가차없이 단칼에 잘랐다.
“거절의 구실로 없는 선약 거짓으로 만들지 말고, 이번에 내가 특별한 경험시켜 주려고 초청하는 거니 암말 말고 따라오세요.”
특별한 경험이라는 유혹에 슬쩍 넘어가고 싶었지만,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발명이 필요했다.
“선약의 주범은요. 저산低山 즉 낮은 산을 등반하는 저산동호회예요. 주로 저산의 험산준령을 등반하지만, 가끔은 저 멀리에 있는 저산을 바라보며 더욱 낮은 곳에서 술을 벗하여 인생을 논하며 풍류를 즐기는 모임입니다.”
“우리산행모임에서 작년에 우이암 뒤편에 타임캡슐을 묻었어요. 이달 마지막 일요일이 타임캡슐을 개봉하는 날이에요.”
“오잉, 타임캡슐요? 그곳에 무엇이 들었어요?”
“안 알려 줄 계획이었는데, 안 알려 주면 안 따라나설 것 같아서 알려 드릴게요.”
“빨랑 말해 봐요. 지금 저산동호회 버스 탑승인원 점검한다며 참석여부 통보하라는 문자 들어와 있어요.”
“술, 술, 술입니다.”
타임캡슐은 한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각종 기념비적인 물건들을 특수 용기에 담아 땅 속에 보관,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후손들에게 개봉토록 하는 인류문화유산 보존 방법이다.
1938년 미국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가 뉴욕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를 상징할 수 있는 물품들을 선정하여 땅 속에 묻으면서 타임캡슐이란 신기한 용어가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지 600주년이 되는 1994년 11월에 서울정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타임캡슐을 매장했다. 훗날, 서울정도 1,000년이 되는 400년 뒤인 2394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그 즈음이면 나는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가 되리라. 그러므로 가까운 곳에서 타임캡슐을 개봉하는 행사가 있다는 데야, 타임캡슐안의 묵은 술을 시음시켜준다는 데야, 아니 갈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읽은 소설 속에는 이별하는 남녀가 10년 뒤 혹은 20년 뒤 다시 만날 것을 굳게 약속하며 타임캡슐을 묻는 장면들이 있다.
소설 속의 지어낸 사연이 대체로 그러하듯, 그들은 정한 기한이 오기도 전에 혼자 찾아가 타임캡슐을 없애거나, 속의 내용물을 바꿔치기하거나, 타임캡슐이 유실되거나, 사망 소식을 듣고 타임캡슐을 파 보았더니 죽음을 예감한 그녀가 유서를 써 놓았더라거나…. 머 그랬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연애영화를 보면 집 밖 외출이 제한된 낭자의 집 담장의 돌 틈에 편지를 넣어두는 도령이 등장한다.
내가 중학교 다닐 적이었던가, 그 친구와 내가 조선시대 도령이 쓰던 서신전달수법을 따라 했다. 어느 날 비가 내려 편지가 물에 젖어 찢어지고 떠내려가 버렸을 때, 우리는 좀 더 완벽한 기술을 연구해야만 했다.
그리고 찾아냈다. 알루미늄 보온병이었다. 일반인의 출입이 뜸한 뒷동산 비각의 주춧돌 뒤쪽의 땅을 파고 알루미늄보온병을 살짝 묻은 다음 판판한 돌로 덮어놓았다.
그는 그 안에 만날 시각과 장소를 넣은 쪽지를 넣었고, 가끔은 사탕이나 작게 접은 종이학 그리고 자신이 손수 만들었다는 조개 팔찌 등도 넣어 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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