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타임캡슐,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인터넷이 없던 시절, 핸드폰이 상용화 되지 않던 시절에는 남녀가 대면하기 위한 비대면 소통 기술이 유선전화거나 편지이거나 지인을 통한 전언 등등 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이 빠지게 보고 싶어 상사병이 걸릴 지경이면 그녀가 다니는 길목이나 집근처를 찬바람을 맞으며 서성거리기도 했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2000년 왕가위 감독이 연출하고 양조위와 장만옥이 주연한 제53회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과 기술대상을 수상한 영화이다.
같은 날 한 건물의 벽을 공유하는 두 아파트로 두 부부가 이사를 오면서 극은 시작한다.
60년대 윤리정서에 기반을 둔 영화의 두 주인공은 비록 자신의 배우자끼리 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도 섣불리 가정을 버리는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자신들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되뇌며 괴로워한다. 두 남녀의 도덕적 자정의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가 선사하는 가장 높은 차원의 메시지이다.
왕가위 감독은 진흙탕 같은 불륜의 거친 이미지는 올이 촘촘한 체에 걸러내고 비단처럼 결이 곱고 애틋한 심리만을 담아냈다. 그래서 영화에 몰입하면 할수록 서사는 삭제된 듯 지워지고, 꿈결처럼 흘러가던 이미지만 뇌리가 아닌 심장에 쌓인다.
영화의 제목 ‘화양연화’는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나눈 연인들이, 훗날 자신들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를 절절한 회한으로 돌아보는 장면은,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을 뜻하는 영화 제목이 두 남녀에게는 ‘가장 불행한 시절’이었다는 역설적인 은유를 담고 있다.
영화 〈화양연화〉의 주인공 차우가 앙코르와트 사원의 돌기둥 구멍에 붉은 꽃 한 송이를 넣고 입맞춤으로 봉인하는 모습/이미지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의 지적 도덕적 미적인 정조는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흘러가버린 사랑, 즉 이별이다.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은 이 부도덕한 마음의 부채를 떠나보낸 10년 뒤에 찾아온다.
여주인공 수리첸은 다시 찾은 아파트에서 창밖을 보며 눈물을 짓고, 남주인공 차우는 앙코르와트 사원의 돌기둥 구멍에 붉은 꽃 한 송이를 넣고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인양 가슴속 비밀을 속삭인다. 그리고 회한의 정서를 머금어 긴 입맞춤으로 봉인한다.
그 입맞춤으로 생동하는 붉은 꽃잎이, 자신의 지나간 사랑이 영원히 시들지 않기를 절절하게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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