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나는 사육 당하듯이 ‘주는 대로 먹는’식이 정말 싫다. 커피가 인스턴트 커피가루 한 가지 뿐이었던 시대를, 치약이 럭키치약 한 가지 뿐이었던 시대를 살아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커피 아니면 홍차든지, 짜장면 아니면 짬뽕이든지, 이도저도 다 거절할 권리라도 주어져야 한다.
“저는 진에 알러지가 있어요. 진을 뺀 보드카 마티니로 주세요. 젓지 말고 흔들어서.”
나는 이미 내 앞으로 놓인 진토닉을 B에게 밀었다. 잔속의 얼음이 프리즘이 되어 천장의 조명을 굴절시켰다. 목로 위로 볕뉘가 아롱졌다.
내가 세라비의 첫잔 진토닉, 볕 그림자가 아롱지는 진토닉을 거절한, 아니 유예한 까닭은 따로 있다.
나는 미술품을 감상하러 전시회장에 가거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러 음악회장에 갈 때 정장을 하고 화장도 하고 작품과 연주자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여 몸과 마음으로 예의를 갖춘다. 장인의 정성들인 작품에 대한 공경이다.
공을 들여 차려내는 음식을 먹으러 갈 때도 한껏 꾸미고 간다. 맛매를 해치는 향수도 뿌리지 않는다. 미식가 요리사의 출중한 실력을 경앙하고, 심혈을 기울인 요리에는 찬사를 보내왔다.
나는 깍두기 국물을 부어넣은 곰탕 한 그릇과 빈대떡과 막걸리를 먹고 끄윽끄윽 트림을 품어대며 왔다. 내 미각과 후각은 몹시 피곤하여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진토닉의 맛을 감별할 능력이 없다.
미구에, 맑은 정신으로, 박하수로 입을 행구고 와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진토닉을 감별을 해주리라고 속으로 다짐한다.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바텐더가 내 말을 받아서 영어로 말했다. 마치 제임스 본드처럼.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는 007 시리즈 영화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대사이다.
1962년에 상영된 첫 편 ‘007 살인번호’의 숀 코넬리로 시작해서 2021년 007시리즈 25번째 작품이자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출연작품인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까지 이 대사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러나 007 시리즈 전편을 감상했다고 하더라도 그 대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얼빠진 사람은 많다.
각 편마다 약간씩의 상황이 다르지만, 대체로 제임스 본드가 바에서 마티니를 주문하는 장면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악당의 소굴에서 벌어지는 파티에 참석하려고 본드걸과 만나는 장면, 즉 극의 본격적인 스토리가 펼쳐지는 시점이다.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에서도 세상에서 남성 정장이 제일 잘 어울린다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셔츠에 검은 턱시도를 입고 등장하여, 앞은 가슴골이 들여다보이고 뒤태를 보자면 새끼똥구멍이 보이도록 등이 파인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본드걸과 쿠바의 야자나무 그늘이 드리운 노천 바에서 만난다.
본드가 바텐더에게 진을 빼고 보드카를 넣은 마티니를 주문하면서 젖지 말고 흔들어 달라고 덧붙인다.
사실은 영화를 보면서 다니엘 크레이그의 바닷물 빛의 눈동자에 풍덩 잠수하여 익사 지경까지 갔던 터라 마티니를 주문하고 마시는 장면을 놓칠 뻔 했었다.
여성이라면 제임스 본드에게, 남성이라면 본드를 도와주러 파견된 CIA 요원 본드 걸의 매력에 얼이 빠져서 놓쳤을 수도 있는 대사이다.
본드와 본드걸과의 핑크빛 인연의 고리가 철커덕 물리는 극적인 찰나이다.
“뭐로 한 잔을 더 하실까?”
올리브가 끼워져 있던 칵테일 픽으로 목로바닥을 콕콕 찍고 있는 나를 보며 제임스가 물었다.
“마지막 잔은, 코냑요.”
유리진열장 안의 헤네시 코냑을 가리켰다.
“두 분이 연인이신가?”
제임스가 B와 나를 번갈아 보며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언젠가는 연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오래된 친구지요.”
B가 나의 답을 가로챘다.
“코냑이란 신혼부부에게 권하는 술이라서.”
제임스는 병 주둥이를 비틀었다. 코르크 마개가 병에서 푱 하고 빠지면서 알라딘의 램프가 열리듯이 갇혀있던 코냑의 향기가 마법처럼 솟아올랐다.
튤립의 실루엣을 그리는 엉덩이가 둥글고 입구가 오므라진 유리잔에 병을 기울인다. 짙은 호박색 액체가 흘러든다.
나는 유리잔 안에 왼손 약지를 넣어 황금색 액체를 찍어본다. 맥이 뛰는 귀 뒤쪽과 손목에 바르고 향기를 맡는다. 흠흠, 아직 아니다. 코냑을 제대로 즐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코냑 잔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감싼다. 나의 체온으로 코냑의 체액을 덥힌다. 한 모금 머금는다. 더운 입안에 감금당한 액체가 기화하며 포도의 감미와 풍미가 코의 점막을 적시며 부드럽게 퍼진다.
“코냑과 진하고 부드러운 다크 초콜릿은 환상의 콤비입니다.”
바텐더가 목로 밑 서랍에서 은박지에 싸인 초콜릿 한 개를 꺼내준다. 나누어 먹으려고 옆을 돌아보니 B는 없다.
밖은 여태 비가 내리나 보다. 우산도 없이, B는 어디로 갔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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