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칵테일 바 ‘세라비’를 나에게 소개한 사람은 B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던 해, 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B가 대낮인데도 술이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그는 나를 꼬여낼 달착지근한 목소리를 연출하려고 나름 꾸몄던 모양인데, 내게는 술에 취해 혀가 꼬인 남자가 전화기를 붙들고 주절주절 웅얼거리는 음파로 전송되었다.
창밖의 경치는 까무룩 물안개에 가라앉고 있었다. B의 앞과 뒤의 말을 이어보았다. 그는 하늘에 주기(酒氣)가 가득 끼었다면서 주님(酒任)을 알현하러 가자고 꼬이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빈대떡에 걸쭉한 곰탕국물에다 소주를 반주로 점심을 먹고 그와 헤어지기가 아쉬워서가 아니라 술과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맥주로 딱 한 잔만 입가심이나 하자며 맞춤한 맥주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맥주집은 아직은 영업개시 불을 밝히기 전이었다.
“이 시각에는 쌩맥주도 얻어먹기 힘들어. 한국도 3시에서 6시는 브레이크타임이야. 차나 한 잔 하자구.”
낮술에 얼큰해진 내가 투덜댔다.
“내가 안내할게. 너섬에 있는 대한민국의 명물 노포.”
“남의 동네 노포술집까지 꿰는 군. 술꾼답네, 그려.”
그는 앞서서 내가 익히 다니던 사임당 빌딩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내가 아는 바로, 지하 1층에는 남성전용 주점들만 모여 있다. 계단을 통해 지하로 걸어 내려가는 사람은 남성전용 주점에 종사하는 젊은 남녀들이거나 술과 여자를 즐기러 그곳을 방문하는 남자들이다. 엘리베이터는 주로 지하2층보다 더 깊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이용한다.
B와는 오랜 친구이기는 하다. 하지만 가끔 나는 자문하고는 한다. 남녀사이에 진정한 우정이 존재하는가. 그는 친구인 척하다가 오누이인 척하다가 어느 순간 연인인 척했다. 끊임없이 내게 일탈을 유혹했다.
“우리가 이쯤에서 건전한 키쓰를 해도 되지 않겠어?”
오늘처럼 어둡고 조용하고 무섬증이 드는 계단을 내려갈 때면 그는 보호라는 명분으로 슬쩍 팔을 내 등 뒤로 돌려 끌어안거나, 엘리베이터에 둘이 남는 순간이 왔을 때 실수인 듯 팔꿈치로 가슴을 지그시 눌러 뭉클한 감촉을 즐기면서 추근거렸다.
불현 듯 건조하고 삭막하던 이성간의 우정에 끈적거리는 에로틱한 행동이 끼어드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비마저 내리면 위험한 연분홍 물감도 스민다.
계단을 내려와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여는데,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뒤따르는 음악은 60년대에 발매한 보니엠의 ‘시즌스 인더 선 (Seasons In The Sun)’이었다. 음질은 조악했다. 음원 스트리밍도 아니고, CD도 아니고, 그렇다고 LP레코드판이 돌면서 쏟아내는 음질도 아니었다.
음악은 가장 안쪽 방 덜 닫친 문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동전을 넣고서 단추를 눌러 곡을 지정하면 자동적으로 음악이 흘러나오는 주크박스가 가게 구석에서 흘러간 올드팝을 토해내는 것 같았다. 울컥 향수에 젖었고, 정말 주크박스가 안에 존재하는지 궁금했다.
안으로 미는 문이었기에 망정이지, 밖으로 당기는 문이었더라면 누군가 튕겨져 나왔을 만큼 실내는 6,70년대 서울의 시내버스처럼 만원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몸을 들이 밀 공간이 없었다.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문전박대 멘트가 흘러나왔다.
“딴 데 찾아봅시다. 세상에나, 번호표타서 술 마시는 술집 봤어?”
“기다려 봐. 내가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할 테니.”
나를 밖에 세워둔 채 B가 낡아서 잘 밀리지 않는 문을 간신히 밀고 들어갔다. 곧 문틈으로 손 하나가 나와서 들어오라는 신호로 손가락을 까닥했다.
실내는 아무리 후하게 인심을 써줘도 3평도 안될 것 같았다. 성인 남자가 어깨를 나란히 대고 좁혀 앉으면 일곱 명, 옆 사람과 한쪽 어깨를 포개 앉으면 간신히 아홉 명까지 앉을 수 있는 목로라면서, 자리를 선점하고 있던 주객들이 틈을 벌려 우리 두 사람을 낑겨 앉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세라비는 목로에 일곱 자리, 목로자리 점유에 실패한 손님을 위한 입구 쪽 벽에 붙어있는 손수건만한 테이블에 딸린 등받이도 팔걸이도 없는 의자 네 개까지 합해서 총11자리가 있는 셈이다.
오디오시스템은 손을 올려야 닿을 수 있는 천장 밑 공간에 설치되어있었다. ‘시즌스 인더 선(Seasons in The Sun)’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세트라니, 신기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로 순간 이동한 것 같았다. 마그네틱테이프를 갈아 넣던 바텐더가 우리를 맞았다.
“처음이신가. 이곳의 첫잔은 진토닉이야. 세상에서 제일 맛이 있는.”
그는 재빨리 손님에게 내놓을 안주인 땅콩을 사각 플라스틱 통에 부어넣었다.
누구 맘대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담.
진토닉의 조주법은 대단히 쉽다. 텀블러 유리잔에 3/4까지 얼음을 채우고 진을 따르고 토닉 워터를 따른 후 칵테일 스푼으로 저어준다. 그리고 라임이나 레몬을 가니쉬로 올리면 완성이다.
정식 명칭은 ‘진 엔 토닉 (Gin and tonic, G&T)’이며 정식대로라면 1:3의 비율로 진과 토닉을 섞는다. 토닉보다 진을 더 많이 넣지는 않는 선에서 바텐더의 취향과 재량대로 비율을 조절한다. 누구라도 집에서 만만하게 조주하여 마시는 칵테일이다.
그러나 훌륭한 미식가 바텐더들은 자신만의 비법을 가지고, 초보자가 넘볼 수 없는 확연히 우수한 맛의 진토닉을 뽑아낸다. 중국 요리집 짜장면이 맛이 없으면 다른 음식은 먹어볼 필요도 없이 발길을 끊는 것처럼, 진토닉은 모든 칵테일 바의 첫잔이자 간판메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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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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